다시 돌아와도


시월
@siwoling



‌  밤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걸까.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이상하게 몸이 자꾸 흔들린다. 걷고 있는 건 맞는 걸까? 어디선가 커다란 경적 소리가 울리고,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홀연 달빛도 별빛도 아닌 인공의 빛이 나를 덮친다. 아프다. 아니, 아프지 않다. 차가운 길바닥과 얼굴을 맞댄다. 밤하늘이 맑고 깨끗하구나. 저 별, 정말 예쁘다… 그 사람과 함께였다면 두 배는 더 예뻐 보이지 않았을까. 그래도 그 사람이 더 예뻐 보일 거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중이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밤하늘이 아름답게 빛나는 자정 무렵.

* * *


  삐삐. 삐삐. 삐삐.
  “또…….”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지만 굳이 일어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까 차에 치였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3월 첫 날로 회귀해버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달려오는 트럭에 세게 부딪혔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로써 나는 열 번째 회귀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영원회귀. 그 누가 사람이 죽었을 때 다시 회귀하라고 만들었는지 몰라도 개 같은 건 확실하다. 사람들은 이 현상을 죽어서 후회를 남기지 말라는 뜻에서, 또 현재의 삶에서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살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다시 회귀할 때에는 그 전의 기억은 전부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게 된다고도 한다. 그리고 열 번째 회귀가 오기 전까지 후회할 일을 전부 없애버려야 다음 생에서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도 말한다. 아니면 속한 곳 없이 허공을 떠도는 영혼밖에 더 될 수 없다나. 전부 맞는 말이다. 나도 처음의 삶에서 후회를 남기고 죽었으니 지금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니까. 그런데 이젠 제발 벗어나고 싶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정말 영혼으로 남게 되겠지. 이상한 건 나에겐 그 전생의 기억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어떡하지, 이번에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머릿속에서 긴 기차가 내 생각을 짓밟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더 이상은 생각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성공하자. 굳은 결심을 했다.


 * * *


  “뭘 그리 열심히 생각하고 있냐? 개학날부터 시험 생각?”
  문득 들려온 익숙한 소리가 내 귀에 울려 퍼졌다. 문득 정신이 들어 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열두시가 넘었다. 그럼 오전 내내 회귀에 대한 생각을 하느라 다 뺏긴 건가.
  “시라부, 너 내 말 듣고는 있냐?”
  “……아, 응. 듣고는 있는데 머리가 좀 아파서.”
  말 같지도 않은 거짓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절대 딴 생각하느라 네 말에 대답하지 못했어, 라고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우리 공주님 머리 아파요? 약 사다줄까?”
  “켄지. 내가 학교에서 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새 까먹은 거지?”
  “내 맘이지, 시라부 공주님.”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후타쿠치 켄지는 몇 번, 몇 십 번을 봐도 아직 익숙하지가 않다. 우리 아직 사귀는 거 아니거든? 한 마디 해주고 싶긴 해도, 싫어하는 것처럼 말해도, 이 말이 싫은 건 아니다. 한 마디 해주려다가 참고는 살짝 화내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는 해 줘야 내 마음이 티가 안 나지. 아직은.
  “뭐야, 화났어?”
  “…화 났다면 어쩔 건데?”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형님! 한 번만 봐 줍쇼!”
  아무리 생각해도 귀여운 자식이다. 귀엽다는 말이 목 끝에서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정말, 아직은 때가 아닌걸. 어쩔 수 없이 피식 웃고 넘겼지만 언젠가는 귀엽다는 말을 한 번 해 주고 싶었다. 이번 생이 아니면 더 이상 너에겐 그런 말을 해 줄 수 없으니까.


 * * *


  까마득히 오래 전, 처음으로 살았던 시라부 켄지로의 삶은 후회가 거의 없었던 삶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못 하는 게 없다고 항상 칭찬을 받아왔고, 소위 말하는 일류 대학에 진학하는데 성공했으며, 직장도 잘 잡아서 돈도 많이 벌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 특히 고등학교 때 만났던 친구들은 나에게 “넌 후회도 없겠네. 다 갖고 사니까. 부럽다.”라고 말했다. 나 스스로도 이 정도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단 한 가지만 빼면.
  후타쿠치 켄지라는 녀석이 문제였다. 나는 그 아이를 사랑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켄지가 없으면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해왔다. 어떻게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욕을 주고받으며 치열하게 싸웠던 것 말고는 첫 순간에 대해서 기억나는 건 별로 없다. 그 이후로 켄지를 남몰래, 그 누구보다 사랑했다. 언젠가는 고백하리라 마음먹고 있었지만 나를 차지하고 있었던 자존심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성 간의 연애를 했다. 나는 눈에 띄는 것이 싫었다. 결국 언젠가는 한다고 마음먹은 고백을 고등학교 졸업하는 순간까지도 하지 못했고, 어느새 연락이 끊겨 켄지가 어디서 뭘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죽고 나서 다시 회귀했을 때에도, 또 회귀했을 때에도, 나는 내 자세를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고.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하면, 영원한 실패다.


 * * *


  켄지와 보내는 일 년은 너무 짧았다. 눈만 감았다 뜨면 하루하루가 사라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켄지와 보내는 시간이라면 1시간이, 아니, 1분 1초가 아까웠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하루하루 쌓아가는 행복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돌아왔다.
  나는 12월 31일, 한 해의 마무리니까 혼자 보내기 싫다고 하면서 굳이 켄지를 불러냈다. 오랜만에 켄지랑 게임도 했고, 시내에서 맛있는 것도 사먹고 그랬다. 행복했다. 하루를 켄지와 함께 보내니 알 수 없는 기쁨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시간이 다 되어 켄지와 함께 캔커피를 사 들고 공원 벤치에 앉았다.
  “…야, 후타쿠치.”
  “왜?”
  나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라고 생각하면서 켄지에게 물었다.
  “…있잖아, 너는 졸업하면 뭐 할거냐?”
  갑자기 들어온 뜬금없는 질문에 놀란 듯, 켄지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을 했다.
  “글쎄, 아마도 일 하지 않을까. 취업이 제일 빠를 것 같은데.”
  “그러냐.”
  “응.”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뭐라고 말을 더 이어가야 하는데, 적어도 내 마음을 조금은 보여주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혼자 살 거냐?”
  “그럼 누구랑 살아.”
  나랑. 단 한 단어만 말하면 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혼은?”
  “갑자기?”
  “아니, 궁금해서. 너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으니까 결혼도 금방 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 새끼, 혹시 뭐 잘못 먹은 거 아니냐?”
  “멀쩡하거든, 시비 작작 털어.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라니까.”
  내가 말하려는 건 이게 아닌데… 그냥 말하지 말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괜한 헛소리를 해서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것 같아 착잡해졌다. 망했어, 씨발. 대체 내가 왜 이딴 소리를 지껄였지. 이제 우린 3학년인데. 졸업할 때 이 소리 했음 또 모른다고. 시라부 켄지로, 너는 어쩌면 이렇게 바보같은 사람일 수가 있냐. 또 다시 찾아온 침묵에 어색해졌다. 그날의 공기보다도 얼음장 같은 싸늘하고 차가운 침묵이 나를 괴롭혔다.
  “결혼이고 나발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가 중요한거지.”
  “…어?”
    “아니, 왜 말귀를 못 알아먹지. 좋아하는 사람이랑 살면 그만이라고. 언제가 되었든.”
켄지가 돌연 침묵을 깨고 말했다. 나는 이성의 끈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뭐? 좋아하는 사람이랑은 살겠다고? …그렇다면 켄지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면 된다는 소리 아닌가.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물어. 공주님 아프냐.”
  “안 아프다니까. 자꾸 병자 취급 하지 말라고요.”
  “그럼 혹시 감성폭발 2학년?”
  “지랄하지 마시고요.”
  그나마 다행인 걸까. 켄지가 나를 좋아하기만 하면 해결될 일이니까. 마음의 안정을 겨우 되찾았다. 왠지 볼이 살짝 붉어진 것 같았다. 켄지의 눈이 저물어가는 해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 * *

  3학년 첫 날이 밝았다. 이제 지긋지긋한 고등학교 생활도 올해가 마지막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 켄지랑 같은 반이네. 다행이었다. 이로써 우린 3년 내내 같은 반이 된 것이다. 이 정도면 운명 아닐까, 싶어 흐뭇했다. 결국 우리는 어떻게든 이어진다는 뜻이니까. 같은 반이 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난 거의 죽을 지경에 다다랐을지도 모르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아있는데 켄지가 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왔다. 자식, 문을 박차고 입장했다. 입이 험하다고 이미 소문났는데 이젠 새 학기 첫 날부터 이런 짓을. 켄지보고 한 마디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말을 걸었다.
  “후타쿠치, 너 진짜 첫날부터 등장이…….”
  “어쩌라고.”
  어? 내가 생각하는 반응은 이게 아니었는데. 작년 마지막 날에 만났을 때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너 왜 그래?”
  “네 알 바냐. 꺼져.”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늘 얘 정말 왜 이래. 집에 무슨 일 있나. 하지만 나를 제외한 다른 애들과 너무 잘 노는 것이 눈에 빤히 보였다. 분명 저건 나한테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거겠지. 내가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화난 게 분명했다. 이렇게 멀어지면 또 안 되는데, 이제 정말 끝이란 말이야. 무조건 사과하고 잘못했다고 빌고 싶었지만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서 착잡하기만 했다. 누가 큰 휴지덩어리를 뭉쳐서 머릿속에 박아놓은 것만 같았다. 씨발,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 좀 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또 어떻게 될지 몰라서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한 달이 가고.
  벌써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왔다. 기분은 더러운데 시험은 시험이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점수 받기는 해야겠고… 후타쿠치 켄지에 대한 생각을 잊으려고 공부만 죽어라 했다. 시험기간이 끝나면 다시 애들은 시험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오는데, 후타쿠치만 돌아오지 않을까봐 겁이 났다. 시험을 3일이나 쳐서 다행스러웠다. 더 오래 쳤으면, 시험만 쳤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시험은 끝나버렸고, 나는 교실을 나가는 켄지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우린 매 시험이 끝날 때마다 하루를 같이 보냈는데, 이번부터는 안 되는 걸까. 이제 그냥 포기해야 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후타쿠치를 사랑하는데, 왜 자꾸 일이 이렇게 꼬여버리는 걸까. 죽고 싶었다. 잘 본 시험도 소용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는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집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느니 자라리 밖에 나가서 뭐라도 하자는 심정이었다. 시내에 나갔다. 혼자 게임을 했고, 혼자 저녁을 사 먹었다. 그리고 다시 동네로 돌아와 공원에 갔다. 한 해의 마지막 날 후타쿠치와 같이 보낸 그 장소. 잊을 수 없다. 그 날 이후로 관계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켄지가 나를 일부러 피한다는 느낌도 종종 받았고, 나도 켄지를 피했다. 서로 충돌해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차라리 보기만 하는 게 나았다. 말을 걸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되지. 젠장.
  바람이 눈에 따갑다. 아무것도 아닌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늘 나, 정말 왜 이러지. 혼자 중얼댔다. 눈물이 눈앞을 가려 공원의 풍경이 흐릿해보였다. 눈물을 닦았다. 저 멀리에 익숙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이렇게 마주치는 건가. 헛웃음이 나왔다. 죽고 싶다, 정말. 분명 켄지인 건 맞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게 이상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점점 그 아이와 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왜 가만히 서 있는 거야. 날 피하던지 하라고, 왜 자꾸 날 보고 있는 건데?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될 대로 되라지. 나도 모르게 켄지에게 소리를 치고 있었다.
  “야, 후타쿠치 켄지! 내 말 똑바로 들어. 너 왜 자꾸 날 피하는거야?”
  아무도 없는 공원에 침묵만이 흐른다.
  “그래, 대답 안 한다 이거지… 씨발,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지 알아야 사과를 하든 말든 할 거 아냐?”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날 쳐다보는 켄지가 싫었다. 지금까진 죽도록 사랑했지만 그 순간엔 죽도록 미웠다.
  “너 원래 그런 사람 아니잖아.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욕이나 몇 번 하고 잊어버리는 거, 그거 너 원래 잘하는 거잖아. 그런데 왜 지금은, 지금은! 아무말도 안 하고 있는 건데? 대체 뭐가 문제야? 어? 입이 달렸으면 말을 하라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쪽팔려. 죽고 싶다. 그러니 한 번 벌어진 일이니 어떻게든 마무리는 지어야지. 이대로 끝장나던가, 화해하던가. 둘 중에 뭐가 되도 나한테 후회는, 미련은 없을 것이니까.
  “넌 이런 새끼였구나. 바보같이 너 같은 개새끼를 좋아해서 이 사단이 난 건데!”
  “…….”
  “씨발. 답답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차라리 완전히 끝장내버리자. 그게 너도 나도 마음 편한 길이다.
  “지금까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다 거짓이었는지도 모를…”
  “시라부 켄지로. 너는 정말 나를 좋아했어?”
  아무 말도 안할 것 같은 켄지가 드디어 말을 했다. 이번엔 내가 침묵할 차례야.
  “…….”
  “대답 안 할 거지?”
  알면서 왜 물어보는 건데.
  “나도 너 좋아했는데, 너는 몰랐구나.”
  “…뭐?”
  “좋아한다고.”
  “거짓말.”
  어느새 눈물이 그쳤다.
  “좋아한다니까, 시라부 켄지로.”
  “…그래서?”
  “좋아하니까 사귀자고, 공주님.”
  좋아, 나는 정말, 좋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후타쿠치가 나에게 화를 낸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응.”
  후타쿠치 켄지에 대해서 더 이상 후회할 일은 없다는 것이다. 저녁의 붉은 노을이 정말 아름다웠던 5월의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