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항상 이맘때 즈음이면 개화했었나, 라고 생각한 것과 동시에 졸업식이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좋아한다. 시라부.”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채워져 있는 셔츠와 재킷의 단추를 바라보다 시선을 올리자 매번 보던 얼굴과 같은 표정의 우시지마 선배가 서있었다.
요새 들어 부쩍 같은 꿈을 꾸는 일이 잦아졌다. 번쩍 떠진 눈과는 다르게 무겁게 다시 내려앉는 눈을 무시하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벌써 수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의 일이었고, 이미 그때의 일은 절반 이상 잊어버렸다고 해도 무방한 시기였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난 탓에 TV를 켜는 여유로움까지 보이며 잠을 깨려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스트레칭까지 해본다. 시사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 어제 저녁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뉴스들이 다시 한 번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료화면이 지나가고 곧 끝나겠지, 싶었던 뉴스는 어느덧 오전 스포츠 소식을 함께 일러준다.
‘이어서 우시지마 와카토시 선수의 부,’
쭉 아래로 내리고 있던 상체를 올려 서둘러 화면을 껐다. 익숙한 이름을 익숙하게 듣는 것에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라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어디를 가던, 뭘 보던 하루 종일 듣게 되는 것은 결국 그 이름이었다. 출근길에 들리는 이름에는 조금 더 이어폰을 볼륨을 올려 라디오 소리를 묻어버렸지만 사무실 내에서 들리는 소리에 대해서는 무방비한 상태였다.
“시라부도 시라토리자와에서 배구했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괜히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피했다. 단순히 배구를 했던 게 아니라 나는 그와 ‘함께’ 코트에 섰었고, 그를 향해 공을 올렸었다. 잠깐 사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은 코트의 소음에 얼른 남은 커피를 모조리 마시고는 뒤를 돌았다.
“…그래서 부상이 심한 건 아니라는데, 귀국한대?” “네?”
동시에 다시 뒤를 돌아보는 나의 손에서 우그러지는 컵의 소리가 내 목소리에 묻혔다. 얼마 남지 않은 점심시간을 보며 빠르게 선배의 이름을 눌렀다. 스크롤이 채 다 내려가기도 전에 쏟아져 내린 기사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기사 제목을 누르자 우수수 열리는 광고 창 사이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입을 꾹 다물고 힘껏 스파이크를 내려치기 위해 뛰어오른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볼 새도 없이 광고 창을 닫으며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경기 중 사인이 맞지 앉아 함께 뛰어버린 다른 선수와의 충돌로 인한 가벼운 부상. 마우스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밀려오는 짜증에 스스로 입술을 짓이겼다. 세터가 이름을 부르지 않은 건가? 선배와 부딪힌 저 선수는 코트 안의 상황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나? 컨디션과 부상에 가장 민감한 운동선수인 만큼 선배가 얼마나 몸 관리에 철저한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부상이 절대로 그의 불찰이 아닐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가벼운 부상정도에 이번 시즌까지는 마치고 잠시 귀국을 한다는 기사 말미에 쓰인 문장을 보고는 어지럽게 켜져 있던 인터넷 창을 전부 꺼버렸다. 그래봤자 이번 시즌에 뛰는 것은 더 이상 무리일 것이다. 하. 짧게 숨을 내뱉으며 책상위로 쏟아지듯 엎어졌다. 그렇게 스스로 의식하면서까지 피하고 외면하던 사람에 대한 존재를 이렇게나 쉽게 다시 인식하기 시작한다.
‘좋아한,’
또다시 번쩍 떠진 눈에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입으로 짧게 내뱉었다. 또. 이번엔 시간을 보지 않아도 평소보다 배는 더 빨리 일어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직 창밖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다. 해는 이제야 막 제 모습을 드러내며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주말의 아침은 조용했고, 나 역시도 아침부터 소리하나 내지 않고 베란다 앞으로 의자를 하나 끌어와 그 앞에 앉아있었다. 손을 펼쳐 손바닥을 한 번, 뒤집어서 손등 쪽을 한 번. 이 손으로 그와 함께 했었다. 누구보다 강한 배구를 하고 싶었던 나의 바람을 그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아니, 애초에 그 바람조차 그로 인해서 생겨난 욕망이었으니 고교시절 나의 배구는 오로지 그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마음과는 다르게 머리는 마음이 외치는 소리를 애써 정정한다. 의자 위로 올려 포개고 있던 다리를 내리고는 땅을 디뎠다. 새벽에 일어나서는 일부러 핸드폰을 보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멀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화면을 켜면 당연하다는 듯이 메시지 함으로 들어갈 나를 너무 잘 알았기에.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아침 뉴스가 시작 될 시간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스포츠 전용 채널의 번호를 꾹꾹 눌러 입력했다.
‘마지막 결승전에 참가하지 못했어도 우승컵을 들고 있는 선수는 역시 우시지마 선수죠.’ ‘네, 아무래도 이번 시즌 우승에 가장 크게 기여를 했던 선수가 아닐까 하는데요,’
여기저기서 번쩍이며 터지는 플래시를 전부 받으며 팀의 중앙에 서있는 사람은 역시나 그였다. 마지막 결승전에서는 결국 벤치 신세를 면하지 못했지만 그의 손에는 당당히 우승컵이 들려있었다. 빛나는 사람은 어디를 가던 빛이 나기 마련이다. 시즌 우승에 맞춰 MVP 수상까지 하며 카메라에 담기는 모습을 보자 어딘가 마음 한편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곧이어 사진 촬영과 인터뷰를 하는 것 모습까지 보고는 다시 리모컨을 누르자 금세 화면은 까맣게 변한다. 나는 항상 그가 이렇게 빛이 나는 사람이길 바랐다. 졸업식 날 나를 향해 고백해오는 그를 보며 느꼈던 감정은 기쁨보다는 원망이 더 컸다. 그저 엇갈린 시기에 대한 억울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접고 접고 또 접어 이제는 저 깊숙이 넣어둔 내 마음을 애써 외면하고 있을 때에서야 비집고 들어온다. 단순히 고교 배구에서 끝이 나지 않을 그의 배구를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이 ‘나’라는 걸림돌은 없어야했다. 오만함과 나에 대한 자만함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겨우 고교 3학년인 나와, 일본을 대표하는 선수가 된 그의 관계에 있어 나는 단순히 어떻게든 그의 앞으로의 선수 생활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그 당시에는 생각했었다.
‘죄송합니다.’
허리를 숙여 그에게 거절을 표하고 뒤를 돌아가려는 나의 손목을 잡은 그의 미간은 거의 티가 나지 않게 구겨져있었다. 살짝 좁아진 미간을 한 그가 다시 되물었다.
‘왜지.’
확신에 의한 물음이었다. 아마도 알고 있었겠지 싶어 더 이상 눈을 마주칠 수 없어 그의 곧게 뻗어오는 시선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이어지는 똑같은 대답에 다시 한 번 나에게 물어보려던 그의 물음은 영영 그의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못했다. 잡힌 손목을 억지로 빼버리고 도망치듯 빠져나온 나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이제 와서야 후회하는 내가 한심했다. 아마 아쉬움과 안타까움 때문이겠지. 나는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보다 내가 그를 원하고 갈망하던 그 무언가가 더 컸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가 가장 싫어하던 근거 없는 자신감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과거 내가 그를 향해 품었던 동경과 애정에서 비롯된 사랑은 그만큼이나 확고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서 멀어질수록 무뎌지는 것이 마음이라고 했는데. 아마 누구든 남의 일이기에 쉽게 얘기할 수 있었겠지 싶어 조금은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게 새벽부터 내내 허한 속 든든하게라도 차려먹기 위해 이것저것 꺼내두었던 음식들을 몇 번 삼키지도 못하고 모조리 음식물 쓰레기 통으로 쏟아 넣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계속해서 외면하던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분명 다시 침대에 쓰러져 누웠을 때는 하얀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잠이 든 건지 눈을 감고 있었던 건지 기억이 없다. 창문을 넘어 붉게 들어오는 노을 진 빛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깊게 숨을 들이마시곤 입으로 짧게 전부 내뱉는다. 쿵쿵 거세게 뛰는 심장에 등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느긋하게 씻고, 느긋하게 준비하고 나온 것과는 다르게 아파트에서 나오자마자 도로변으로 뛰어가며 택시를 잡았다. 생전 없던 손톱을 씹는 버릇이 갑자기 생긴 것인지 틱, 틱 거리는 소리가 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에 묻히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굴던 나는 의외로 또다시 덤덤하게 속을 가다듬었다. 예상외로 조용한 공항 안으로 들어가며 티 나지 않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출국장 바깥은 발 디딜 틈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시간을 잘못 알아 엇갈린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절로 다시 엄지손톱을 잇새로 가져갔다. 명치에서부터 가슴까지 올라오는 이상한 감정은 온 몸을 차게 만든다. 핸드폰 화면을 켜자마자 다시 보이는 메시지에 얼른 창을 바꿔 아침에 읽었던 기사를 다시 찾기 위해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인다.
“손톱.”
앞니로 딱 딱 소리를 내며 뜯겨지고 있던 엄지손톱이 예고도 없이 잇새를 빠져나간다. 손을 다 덮을 만큼 큰 손에 잡힌 손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어정쩡하게 들려있었다.
“물어뜯는 버릇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
이번에는 손톱 대신 혀끝을 물었다. 심장소리에 다시 등이 울린다.
“시라부.”
낮은 목소리가 그대로 귀를 타고 들어와 다시 한 번 심장에 울리는 것처럼 퍼져나가는 것만 같은 느낌. 머리가 어찔하게 느껴져 금방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보고 싶었다.”
[시라부] [보고 싶다]
정직하게 보내온 메시지는 몇 년간이나 묻어왔던 나의 접혀질 대로 접혀진 마음을 다시 펴기에 충분했다. 나 자신마저도 외면하고 있던 그에 대한 마음을 그는 결국 그의 손으로 끄집어내버린다.
“우시지마 선배.”
아아. 이렇게나 쉽게 무너질 거였다면.
“아직도.”
이렇게나 쉽게 받아드릴 거였다면.
“좋아하고 있다. 시라부.”
눈물이 날것 같이 눈두덩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얼른 눈썹을 찡그리며 입술을 물었다. 잡혀있던 손을 끌어당긴 그가 품에 나를 안기 전에 먼저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뒷머리를 감싸오며 조금 더 깊숙하게 품에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