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거를 당길 수 있는 소재와 단어들이 많습니다. 글쓴 본인(@g00du1)은 글에서 언급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절대 옹호하지 않고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잘 하는 게 뭐니.'
'이런 짓이요.'
'취미는.'
'없는데요.'

지나치게 어렸던 시라부다. 두꺼운 패딩을 걸쳐도 손이 얼고 살이 어는 겨울 날, 시라부는 피가 묻고 늘어진 하얀 티셔츠와 깡마른 허벅지의 반도 못 오는 속옷 차림으로 나를 마주했다. 그맘때쯤, 나는 직원 하나를 구하고 있었는데 마침 두 손 위에는 마커로 적힌 전단지 한 장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시라부와 눈이 마주쳤다. 일자리 필요하세요? 네.

시라부는 모두가 입고 다닐 때 옷을 벗어야 했고, 모두가 벗을 때 입어야만 했다. 첫 날, 덥수룩한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뒤 치장해주니 이게 웬걸. 바다에 물고리를 풀어준 격과 다름이 없었다. 시라부는 이런 하류급 화류계 직업에 꽤나 어울렸다. 그러니까, 나는 그 날 대단한 인재를 건진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시라부는 자신을 열 여덟이라 소개하는 것에 능숙했고, 기분 나쁜 터치를 피하는 것 또한 눈치 빠르게 대처했다. 뺨을 맞으면 시라부는 비실비실 웃었고, 얼음이 담긴 잔에 술을 따르는 것에 능했다. 아무리 잘 도망가는 게 재능이라 해도 이젠 필요없어. 도망 안 가요. 약속하니? 약속해요.

시라부가 온갖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타기 시작할 무렵, 나는 꽤 대단한 손님을 만났다. 이름도, 가명도 알려주지 않으며 그저, H 라는 네임 하나를 목에 걸고 나타난 졸부-그는 그렇게 소개했으나, 돈의 활용이나 계집을 고르는 태만 보면 꽤 오랜 시간 돈을 만져본 사람 같았다.-. 그는 시라부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시라부는 여간 무심했다. 아니, 슬 지친 모습이었다.

'외도를 허락해줄게.'
'그런 거 별로 필요없어요.'
'명령이야.'

아, 그리고 시라부는 꽤 영악하다. 그것도 무자비하게.


01

'켄지로라고 불러 주세요.'

시라부와 마주 보고 앉은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할 일이 주어지지 않아, 명령어 입력이 되지 않은 멍청한 로봇 마냥 나무처럼 서있는 시라부를 응시할 뿐이었다. 일렁이는 술잔을 보며 그는 색감이 참 이질적인 소파 등받이에 편히 몸을 뉘인다. 시라부는 그제서야 발을 떼어 그의 옆자리로 향했다.

'시라부 켄지로, 맞지?'
'네.'

시라부는 비워진 술잔에 싸구려 양주를 다시금 채웠다. 그는 시라부의 눈동자를 한참 주시한다. ...... 공허한 정적이 흐르더니, 그것은 곧내 그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끝을 내렸다.

'네 집안은 죽은 네 아비 덕에 풍비박산이 났고,'
'......'
'네 아비는 네가 죽였지.'

시라부는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그의 손에 쥐어 잡혔으나 아프다는 말도 없이 그저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그가 읊조린 모든 말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그래,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이야기 하자.

후타쿠치 켄지. 누구 덕에 사람 죽였다는 오명까지 쓸 뻔했던 놈.
그는 시라부에게 퍽이나 예의있는 꼴로 손을 내밀었다. 시라부는 고개를 숙였고, 그가 내민 손으로 시라부의 턱을 잡아 올렸을 때. 어쩐 일인지 시라부는 울고 있었다.



02

 시작은 여덟 살 시라부다.
감창할 정도로 덥던 여름 날이었다. 시라부는 어미와 퍽 사이가 좋아 손을 붙잡고 간판 떨어진 슈퍼마켙으로 가던 중이었다. 어미는 시라부에게 사탕과 하드 하나를 쥐어주곤 슈퍼마켙 앞 마루에 앉아 있으라는 말을 남긴채 사라졌다. 아줌마, 엄마 어디 있어요? 시라부는 두 손에 녹아 흐른 하드의 단물을 쪽쪽 빨아 먹고 있었다. 검은 눈망울이 적잖게 불쌍해보여 아줌마는 그의 손에 하드를 하나 더 쥐어주었다. 집 가라. 엄마는요? 집에 있겠지.

그리고 다음 날, 엄마는 당연히 오지 않았고 시라부는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하드를 꺼내 이로 물고 있을 참이었다. 시라부는 학교 갈 준비도 하지 않고 멀뚱히 시계를 보고 있었을 거다. 아마도, 여덟 시 이십 분. 창문 넘어 넘어 겨우 보이는 학교 운동장에서는 꼴에 생긴 방송부가 동요를 틀어놓고 등교 중인 학생들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시라부는 넋을 놓고 있었다. 뚝, 뚝. 무릎께로 떨어진 아이스크림의 녹은 단물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리고, 무섭게 휘몰아치는 현관문의 전등도 아니었다면.


*
 
시라부는 오늘따라 유난히 힘들어했다. 후타쿠치의 여파라고 생각하기엔 지나치게 사적인 모습으로 말이다. 지친 눈과 느릿한 행동. 마담은 그런 시라부를 다른 말 없이 훑기만 한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마담과 시라부가 만난지 정확히 일 년이 지난 날일 거다.

 아침에는 당연히 시라부가 모두를 깨웠다. 마담은 다를 것없이 시라부와 더불어 식사를 나누었고 늦게 일어난 계집들은 청소를 하며 시작하는 이상할 것 없는 아침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시선을 주고 받는 마담과 시라부는 유난히 이상하게 굴었다. 우리들은 모두 마담과 시라부가 밀회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시선을 마주치고 되받는 둘의 눈빛이 이상하게 시렸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오늘 하루만 나갔다가 와도 돼요?'


나는 우연치 않게 그 장면을 목격했다. 치장을 끝내고 무료함에 잠시 닫히지 않은 룸을 눈가로 훔칠 즈음 본 것이다. 말보루를 물고 시라부를 바라 보는 마담과 그런 마담 앞에 서서 우물쭈물 말을 꺼내는 시라부. 아. 나는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시라부는 어젯 밤 방문한 그 남자와 눈이 맞은 거다.
 확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일 년동안 잠잠히 굴었던 시라부가 갑자기 밖을 나간다고 꼬리를 흔들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어슴푸레 나는 시라부와 단 둘이 있었던 H, 이름만 듣던 그를 상상했다. 소문과 다르게 돈만 많은 뚱뚱한 아저씨거나, 아니면 멸치처럼 생겨서는 지갑만 더부룩한 청년이거나. 풉. 웃음이 절로 지어진다. 허나 내 몹쓸 상상도 곧 끝이 났다. 좋아, 대신 약속했던 건 있지 마렴. 그리고 새로운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마담의 목소리가 끝나자 기막힌 우연인 것처럼 내 뒤로 그림자 하나가 졌다. 비켜 주세요. 깔끔한 화이트 머스크 향. 숫한 처녀 울렸을 법한 계집스런 목소리. 고개가 돌아가기 보단 먼저 몸이 옆으로 틀어졌다. 눈이 마주친 그는 분명 H가 분명했다. 그러니까, 내 상상은 모두 틀렸다. 나는 패배를 인정했다. 주자없는 마라톤을 시라부가 단번에 이겨버렸다. 그가 들어가고 마담과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마담이 문을 열고 나온다. 저 사람 누구예요? 돈줄이지.

근데 왜 시라부랑 있어요?
......돈줄이니까.

나는 적잖게 시라부가 의심스러웠다.


지나치게 호화스러운 차 안은 시라부와 기이한 괴리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표현하자면 본래가 싸구려와 어울리는 종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이질적이었다. 귀끝을 일렁이는 사내 치곤 긴 머리칼과 마담이 차려 입혔을 게 뻔한 단정치 못한 셔츠. 그것도 쇄골이 훤히 보일 정도로 풀어 헤친 모습이다. 후타쿠치는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시동 조차 걸지 않은 운전석에서 그런 시라부를 노골적이게 응시했다. 시라부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다. 후타쿠치는 시라부 낯에 담배 연기를 토해낸다. 아저씨 저랑 자고 싶어요? 미쳤니? 심각하게 일상적인 하루인 것처럼 둘은 그렇게 굴었다.

시라부가 웃었다.

03

허벅지를 타고 올라가는 뱀 두 마리의 느낌이 참 이상하다고 시라부는 생각했다. 아이스크림이 전부 녹아 바닥으로 스며들어 막대기는 처참한 모습으로 변한 끈적한 액체의 냉기를 느끼기 위해 몸을 뒹굴 뿐이었다. 물론 자의적일 순 없다. 회색 양말의 뒤꿈치가 그것을 밀었고, 회색 양말의 몸통에 달린 두 뱀들은 정제원을 안아들었다. 시라부는 자신처럼 나풀거리며 저 멀리로 밀려진 막대기를 전부 목격했다. 아아. 시라부는 모조 가죽으로 되어있는 소파 위로 던져졌고 시야는 어지럽게 흔들리던 참이다. 해가 창문을 비추어준 탓에 천장에는 어슴푸레 무지개가 보였다. 허나 금방 그것은 어두운 그림자에게 먹혀버렸다. 시라부가 눈물을 터트렸다.
시라부는 유난히 엄마를 그리워했다. 그림자가 자신을 갉아 먹으면 먹을 수록 자신의 어미에 대한 그리움은 배가 되어 커져만 갔다. 창가 넘어 넘어 보이던 운동장 위로 눈이 덮히고 녹고를 열 번 정도를 반복했을까. 그림자가 말했다. 넌 네 엄마를 닮았어. 시라부는 눈을 감았다. 이젠 생각도 나지 않던 마지막 날의 엄마를 그렸다. 흔들리는 몸뚱아리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기억해내기 위해 바둥거렸다. 그림자는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래서, 죽여버리고 싶어. 기억도 나지 않던 그녀의 얼굴 위로 심히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시라부는 그림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살고 싶어요.

04


'가고 싶은 곳은.'

딱히 없어요. 창가에 고개를 고이 기댄 시라부는 일 초마다 바뀌는 창문 밖의 환경을 멀찍히 보고만 있을 뿐이다. 목소리는 나긋하게 울렸으나, 시선에는 동요가 없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 빠르게 후타쿠치가 알아차렸다. 정적, 침묵. 유난히도 낯선 것들. 그것도, 시라부 켄지로에게.

'...집 가고 싶어요.'

신호가 멈추자 후타쿠치는 시라부를 바라보며 할 말을 아낄 뿐이다. 생기도 없이 돌아가는 눈동자가 심각하게 처량하다고 생각한 후타쿠치였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켄지로요, 시라부 켄지로. 이렇게 형식적이고도 어설픈 대화가 시답잖게 이루어지는 걸 보면 그들의 사이가 지나치게 명확해지곤 했다. 꽤 심각하게 말이다.

'집에 가면 뭐 할 건데.'
'글쎄요.'

시라부는 그저 집이라는 말 한 마디만 했을 뿐인데 벌써 후타쿠치는 익숙하게 썩은 골목으로 차를 끌고 왔다. 그리고 곧 시동을 끄며 갓길에 주차를 했을까. 시라부는 너무나도 익숙한 이 골목을 기억하는 눈치였다. 아니, 기억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어두운 골목 끝을 응시하던 시라부가 더운 한숨을 토해냈다. 후타쿠치는 담배를 다시금 입에 물곤 불을 붙이던 참이었다. 아빠, 죽었던 거 맞죠? 후타쿠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라부가 고개를 숙였다. 물음의 뜻이 확신 뿐만 아니라 그다지 좋은 의도가 아니었음을 확신한 후타쿠치는 담뱃재를 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털어가며 시라부 옆에 선다.

'왜 죽였는데?'

시라부는 울고 있었다. 후타쿠치도 지나치게 잘 아는 눈치였다. 담배가 반이 타들어가고 있는데 후타쿠치는 한 모금도 빨지 않고 있다. 기다리는 눈치다. 정말, 기다리는 눈치다.

‘둘 중 하나가 죽으면 끝날 줄 알았어요.’


역겹고 답답해서 꼭 그렇게만 하면 끝날 줄 알
았는데… 바람이 부니 끈덕지게 뿌렸던 스프레이의 향이 코끝을 아리게 만든다. 시라부는 한참 잊으려고 노력했지만 다른 의미로 그리워만 하던 골목이 다시금 아른거리니 딱, 죽을 맛이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좆같은 사람이 나를 사랑했대요. 마지막 이곳을 지나쳤을 때 내가 보이는 기분. 흐트러진 모습이었지. 그런 꼴로 마주친 모든 사람의 눈동자가 기억난다. 나는 끔찍한 이 기억력을 죽여버리고 싶은 욕구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담배 연기가 넘실거린다. 감정이 너무 벅차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진정해야만 했다. 나를 사랑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을 추억하기엔 너무나도 깊은 곳에 그것을 꾸역꾸역 쑤셔 넣어놨기 때문에, 굳이 그것들을 꺼낸다면 나만 비참해질 게 문명할 테니까. 그래야만 했다. 울음을 그치지도 못 하고 고개를 드니 눈이 마주치는 그의 시선이 짙었다. 숨을 크게 들이 마시니 바닥으로 추락해 꺼지지 않는 불 때문에 필터를 넘어 타고 있는, 조금은 역한 담배 연기가 폐를 채웠다.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못 받아봤구나. 불쌍하나요? 조금.


05

왜, 너 그런 거 잘하잖니. 연민 얻는 거.

마담이 원하는 건 돈이었다. 나를 팔아서라도 그에게 돈을 받고 싶어했다. 어쩌면 하류급의 사람들만 찾는 이런 단란주점 탈을 쓴 불법 업소에 후타쿠치라는 사람은 너무나도 큰 돈줄일 테니까. 수많은 손님들 대신 나는 후타쿠치 전용이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들어가고 나오고를 반복했다. 딱히 질리거나, 싫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를 보면 가끔씩 떠오르는 검은 그림자가 너무나도 생생히 기억났으니 말이다. 난 추억을 얻을겸 그렇게 굴었는데 마담이 원하는 건 그가 나를 사랑하게끔 만드는 거란다. 꼭 죽은 것들을 발음하는 것처럼 아직도 낯선 사랑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사랑, 사랑, 사랑.
그치만, 난 사랑이랑 어울리지 않는 걸.

그녀는 날 이곳에 들였다는 것에 꽤 자부심을 갖고 있는 태도였다. 난 그다지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아니었으면 내가 길바닥에 굶어 죽었을 거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글쎄, 그랬을까. 나는 지나치게 애매하게 굴었다. 그녀를 화나게 만들기 딱 좋은 행색을 하고 말이다. 정리도 되지 않은 머리칼을 마담은 유난히 싫어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랑 첫 만남이 생각난다나 뭐라나.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어요?'

나는 아닌데. 나는 이 사람을 봐야지만 마담과의 첫 만남부터 반갑지 않은 추억들이 떠오르는데. 잠식했던 검은 그림자의 얼굴까지도. 눈이 마주치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마구 치솟는다. 검은 그림자가 뒤덮은 그의 얼굴 위로 뱉어주고 싶은 단어. 사랑. 역겹고 좆같은 그런 사랑.

'마담이 너 때리니?'
'아니요.'
'근데 왜 나를 보고 싶어해.'

다시 태어난다면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숨을 같이 나눠 쉬고 조금은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 하나가 생기니까 생각은 금방 바뀐다.

사랑하니까요.
역겹고 우울한 내가 당신을 사랑해야만 당신을 투영해 그 검은 그림자와 마주칠 수 있을 테니까요.



06

 '천 이백 원 맞죠?'

오냐. 시라부는 이제 심부름 같은 건 쉽게 하곤 했다. 더불어 백 원짜리를 주지 않고 항상 오백 원을 주던 그의 아버지는 시라부가 남은 삼백 원으로 무엇을 하든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색소가 혀에 벌겋게 녹아 아무것도 안 먹었다며 거짓말 하는 성숙치 못 한 시라부의 모습은 나름 눈요깃거리에 충분했을 테니 말이다.

'엄마는 아직도 집에 안 왔니?'
'네.'
'아빠는 잘 해주고?'

시라부는 한참 대답을 망설였다. 금방이라도 물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뱉어내고 전부 다 말할 셈이었으나 그 나이의 시라부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저 웃는다. 아줌마는 그런 시라부를 보고 이미 시라부의 기억 속에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의 엄마-부모-를 욕하고 있었다. 시라부는 그저 곱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 먼저 자리를 피했을 뿐이다. 안녕히 계세요. 이상하게도 그 상황이 화가 나지 않았다. 멍청해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라부는 차가운 소주를 껴안았다. 울고 싶었지만 울음을 참아내면서 말이다. 사실 이미 그의 어미는 어두운 그림자에 먹힌지 오래다. 시라부는 단맛이 가시지 않은 입을 다물며 계단을 내려갔고 칙칙한 반지하,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어두움을 헤쳐 나가기 전.

아.

검은색 비닐봉지에 담겨있던 소주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 아... 시라부는 쉬이 말을 꺼내지 못 했다. 집 앞에는 검은 양복의 무리와 산발이 된 머리칼을 정리하는 익숙하면서도 기억하지 못 할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파멸음과 함께 그들의 시선이 날카롭게 시라부를 향했다. 그러나 시라부는 귀를 울리는 파열음을 무시하고 뒤를 돌아 넘어질 듯 힘이 다 풀린 다리로 급히 슈퍼로 돌아가기 바빴다. 그렇게 울고 싶었는데 결국 눈가에는 눈물이 잔뜩 달린 모습으로 말이다. 그 어두운 골목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빠져나가며 시라부는 기가 찰 정도로 울음을 터트렸다. 행복함의 눈물이 아닌 것. 요상한 울음. 그런 것들. 아줌마, 아줌마... 엄마, 가 왔어요. 엄마, 엄마가...
 왜 이 좋은 날 울고 그러니.

시라부를 태운 자동차는 꽤 거칠게 덜컹이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검은 정장의 무리들이 뒷좌석에서 시라부를 사이에 두고 그의 어미를 감시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시라부는 자신의 아비가 무슨 일을 당할지 이미 눈치를 챈 모습이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서럽게 눈물을 흘리면서 미동도 하지 않는 정장들에게 고개를 부빌 뿐이다. 시라부는 그간 제대로 된 교육도, 사랑도, 또 어느 사람들과 인연을 맺는 일도 하지 못 했다. 그의 어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시라부를 마루에 두고 돈 몇 푼 쥐어주지도 못 하면서 떠났던 그 날, 이미 시라부가 무슨 일을 당할지 전부 알고 있었다는 날. 그녀는 백미러로 여전히 큰 덩치를 가누지 못 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의 아들을 보았다. 참 역겹다, 라고 생각한 그녀였다.
그런데 과연 달랐을까? 그녀가 자신의 아들을 두고 도망가지만 않았어도 아들은 올바르게 클 수 있었을까? 그녀의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 부터 이미 손찌검을 당해온 그녀의 입장으로 본다면, 과연 자신이 무언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이제 엄마랑 사는 거야.'

시라부는 그저 그녀에게 귀찮은 짐일 뿐이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자신을 대신해 그의 아비가 그녀에게 했었던 괴팍하고 올바른 수준을 넘어섰던 폭력을 시라부는 전부 받아들였다. 그녀와 시라부가 백미러로 통해 눈이 마주쳤다.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된 모습이다. 그녀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정장들에게 잠시 차를 세워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갓길에 멈춘 자동차 덕에 시라부는 빠르게 눈동자가 굴러갔다.

'엄마가 밉니.'
'......'
'내가 원망스러워?'

질문은 탁했다. 답할 의미도 없는 가치 따위의 질문을 하는 자신의 어미를 시라부는 흘겼다. 성격하고는. 그녀는 혀를 짧게 찼고 운전석에 있는 정장과 대화를 나눈다. 역겨워서 같이 못 있겠어서 그래. ...그래도. 뭐, 알아서 하겠지. 여기서 집을 돌아가겠어, 뭘 하겠어?
안전벨트도 풀지 않고 뒤를 돌아본 그녀와 눈이 마주친 시라부는 터진 입술을 짓문다. 네 아빠가 그렇게 좋음 가도 돼. 그리고, 돈 필요하면 연락하고. 후줄근한 티셔츠 위로 날카롭고도 빤듯한 종이가 툭, 부딪혀 허벅지로 굴러간다. 시라부는 그것을 받아 들곤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내려. 그녀의 목소리에 정장들은 시라부를 그 시내도 아니고, 마을도 아닌 어중간한 갓길 위에 던져놓곤 다시금 차를 운전했다.

나, 많이 역겨운 아들인가 봐.

헌 신발로 무작정 뒤를 돌아 뛰는 시라부는 또 울고 있었다. 거친 손이 그의 뺨을 때렸을 때도 이렇게 울진 않았었다. 칼을 들고 와 나를 죽일 거라고 협박했을 때도, 물기가 서린 소주병이 깨져 유리가 발바닥에 박혔을 때도, 정말이지 이정도로 울진 않았을 거다. 그제서야 시라부는 버림 받았다, 라는 감정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그 날 시라부는 해가 다 지고 달이 위태로이 산끝에 걸릴 무렵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보인 것은 난장판이 된 집안, 그리고 아무리 찾아도 없는 자신의 아버지. 시라부는 주저 앉으며 허탈한 실소를 터트렸다. 난생 처음 드는 회의감. 역겨움. 이유 모를 구역질.

'있었구나.'

불이 껌뻑인 신발장을 멍하니 응시한 시라부의 초점에 누군가가 들어온다.

'가버린 줄 알았어.'

같이 죽자, 이제. 시라부는 허탈한 만족감이 자신의 몸을 채우는 걸 느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정말 나와 같이 죽을 생각이었다면 먼저 나를 죽이고 죽어야 맞는 게 아니던가. 왜 그 칼을 내 손에 쥐게 하고 숨을 잃어버리는 건가. 저 사람은 왜 마지막 말로 나를 사랑한다 그랬던 건가. 그 전에 사랑한다는 건 무슨 뜻이던가.


*
 

항상 밖만 나갔다가 들어오면 버릇처럼 아픈 게 몸이었다. 눈을 뜨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얇은 이불을 끌어 당기며 시린 바람이 닿는 발목을 몇 번 이불께에 문지르는 짓을 반복했다. 누구보다 거짓된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면서도 나는 그 날 후타쿠치에게 거짓말을 짓껄였다. 후회한다. 지금, 아주, 그것도 충분히. 솜이 가득 들어차지 못 해 낮은 배게에 고개를 묻었고, 한숨을 짙게 쉬어낸다. 차라리, 눈을 떴을 때 지독히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차라리 쇼크사로 콱 죽어버리던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난, 무엇을 위해 이렇게 행동해야만 하는가.
정체도 알 수 없는 생각들을 내가 삼켜질 정도로 하고 있다. 사라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다짐한 순간이었다.
 누나. 내가 사랑 받으면 뭐가 달라질까.
마담의 커리어.
내가 달라지는 건?
없을 걸.


 08

 밉다. 정체 모를 감정이 시라부를 삼키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향한 원망이 쉴새도 없이 쏟아진다. 며칠 사내들과 정분을 나누지 못 하니 이런 짓 하는 것도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면처럼 걸리고 있던 무의식의 무덤덤함이 풀린 거다. 마담이 안다면 달갑지 않아할 게 분명하니 시라부는 숨을 죽이고 술잔에 술을 채운다. 안 좆같은 게 없고, 안 싫은 게 없다. 역겨운 손이 허벅지를 올라가는 느낌, 그거, 참, 좆같아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시라부, 이러면 안 돼. 안 되는데. 정말.

'켄지로. 잠깐 나와.'

손가락을 이로 물어버릴 셈이었다. 뚱뚱한 손가락에 피가 맺히는 걸 본 후에야 이 좆같은 심정이 다 풀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술병으로 이 돼지의 대가리를 내리치고, 깨진 유리 조각으로 전부 그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건 금방 익숙한 마담의 목소리로 인해 접어야만 했다. 곱게, 아주 곱게.

'오랜만.'
'안녕하세요.'
'가자, 이제.'

어딜 가요. 안 갈 거면 말고. 마담은 내 뒤에 서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난 내가 남의 뒷통수를 후릴 생각만 하고 있었지, 이런 말을 듣고 있으니 마담이 금방이라도 내 뒷통수를 깨트릴까 싶은 두려움이 들어 고개를 잠시 돌렸다. 눈이 마주친다. 뱀 눈동자처럼 탁하고, 흐린 눈동자가 흔들린다. 늙은 뱀도, 이제 진주 하나를 잃었다.

 09

 '사랑한다는 말, 거짓말이에요.'

 알아. 근데 왜 이렇게 잘 해 줘요? 불쌍하니까. 지나치게 진실된 말에 시라부는 느린 코웃음 한 번 쳐준다. 이 차, 언제 다시 타나 싶었다만. 마담은 내 짐이 없다고 말했다. 사실은,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전부 마담이 사준 옷이기에 벗어야 했지만, 그녀는 그런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자기가 놓은 덫에 자신의 발목이 잘린 표정을 하고 마지막까지 날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표정을 지을 거면 주머니에 있는 두툼한 돈봉투라도 좀 가리고 하던가. 헛웃음이 터진다. 시라부는 갑갑한 안전 벨트 아무렇지 않게 풀고는 창문을 내렸다.

'원래 다 그런 거래요.'
'내가 널 불쌍히 여기는 게?'
'아무래도 부모들 피에 있었던 기구함이 유전된 거겠죠.'

날 제일 불쌍하게 만든 아빠도 날 불쌍하다 여겼으니까, 그럴 만도 해요. 지친 추억 회상이 옅다. 시라부에게 남은 과거들이 죽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웅웅 울리는 바람 소리가 곱지 않아 그런 과거들은 더 쉽게 눌렸다. 망각의 샘이 있다면 이미 반쯤 떠내려간 것들이 시라부를 아쉽다고 쳐다보고 있었을 거다. 그래서 죽였어? 아니요. 그럼.
 ...그러게. 왜 죽였더라.
시라부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지는 걸 볼 수 있었다. 후타쿠치 또한 그런 시라부를 잘도 보고 있다. 빨간 불에 차가 멈춰서고 익숙하게 담배를 물면서 시라부를 훑는 눈동자가 꼭 익숙한 마담처럼 빛났다. 그게, 정말, 무어랄까. 죽어가던 뱀이 서식지를 바꾼 느낌이랄까.

사랑해서 죽였나 봐요.
나도 죽이겠네.
조심하세요.
시라부는 언젠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던 유년기 시절을 더는 떠올리지 않는다. 죽음을 갈망하지도 않고, 멍청하게 숨을 거뒀던 검은 그림자의 얼굴도 지웠다. 후타쿠치를 보면서 자신의 아비를 투영해 보지도 않았고 숨을 쉬면서 갑갑함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리고 굳이 자신이 그 아비를 죽이지 않았다고 부인하지도 않는다. 본래 기구한 인생인 터라 평범한 삶을 배우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일지 몰라도 시라부는 나름대로 잘 하고 있었다. 정확히 3년 정도가 지난 뒤, 시라부가 몸담고 있었던 불법 업소는 경찰에게 소탈되었고 그저 사채업만 꾸준히 이어가며 시라부와 동거하던 후타쿠치는 근래 뒷골목들을 하나로 모으며 우두머리가 됐으며 시라부는 그 옆에서 그 누구보다 평범히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