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불화(이혼), 자살, 살인에 트리거가 있으신 분들은 작품 읽기를 권장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자살 묘사는 매우 상세한 편이니 주의해 주세요.
1. 서론 2056년? 2057년? 오늘날 확실히 연도는 살아가는 데 중요치 않다. 연도를 비롯한 많은 문명이 쓸모없어진 지는 아주 오래되었다. 달력을 날짜 확인 용도로 사용하는 대신, 팔에 두를 보호구로 사용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카와니시는 출처가 불분명한 고기를 씹으며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니까, 멸망의 시작은 2년이 좀 더 된 과거에서부터였다. 그 바이러스의 발병지는 멕시코 서부의 강이었다. 사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최초 감염원이 누구인지. 어떤 경로로 감염이 이루어졌는지. 카와니시가 바이러스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단 하나, 그 망할 것의 학명뿐이었다. B612 virus. 랍도바이러스과에 속하는 신종 바이러스라고 얼핏 들었으니, 어쩌면 감염원은 ‘누구’가 아닌 ‘무엇’으로 표기해야 올바를지도 모르겠다. 바이러스는 뇌에 침투했고, 숙주를 어린아이 상태로 만들었다. 사리 분별이 힘들고 무작정 당장의 감정 표현에만 충실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에 붙은 학명이 어린 왕자의 별을 본뜬 B612였다. 감염률은 높았고, 사망률 또한 마찬가지였다. 바이러스 자체의 증상은 미미한 열과 두통쯤이었으나 감정의 확장은 자살률, 그리고 살인 사건을 증가하게 했다. 게다가 감염 초기에 나타나는 이 증상은 보통 감기와 전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뿐이었으면 그나마 나았으리라. 바이러스는 돌연변이를 낳았고, 시간이 지나며 다른 증상이 점차 나타났다. 생살의 괴사였다. 요약하자면 감정 표현 불능의 좀비 떼가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데 1년이 안 걸렸고, 그로부터 1년이 더 지난 지금은 살아 있는 사람의 수가 현저히 줄었다는 거였다. 그들은 아주 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했고, 먹이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표적은 같은 인간으로 맞춰졌다. 동족, 그러니까 똑같이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까지 먹이로 취급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그러나 실상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그들은 욕구만 충족되면 마치 치료가 완료된 환자와 다를 바 없이 굴었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수틀리거나 허기가 지면 금세 도끼를 주워들고 달려드는 것이다. 카와니시는 개중 용케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철저히 운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굳이 살아남으려 기를 쓴 것도, 월등한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신은 확실히 그의 편이라고 볼 수 없었다. 부모와 자신이 알던 모든 사람은 처참히 죽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세상에 정말 신이란 게 존재한다면, 아주 일말의 양심은 있는 모양이었고, 카와니시에게 그 양심이란 시라부 켄지로를 뜻하는 거였다. 시라부는 자살을 입버릇처럼 읊었다. 동경하는(좋아하는, 이 아닌 동경하는, 이었다) 시인은 이시카와 다쿠보쿠라고 했다. 카와니시 쪽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필체도, 문학성도 아닌 자살에 관한 교집합에서 매력을 느꼈다나. 모래사장에 死자를 백 번 적고 죽었다는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한데 부럽다고.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으나 카와니시는 애써 이해하는 척하며 고개를 까딱였고 그게 벌써 1년 전의 일이었다. 이제는 그 말에 동감할 수 있다. 시라부가 죽고 싶다는 소리를 할 때 그는 구태여 말리지 않았다. 내가 널 사랑하는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냐며 화를 내기엔 카와니시도 지칠 대로 지쳤다. 대신, 그는 어떻게 죽을지에 관해 되묻기 시작했다.
2. 본론 그럼 시라부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끼적이는 소리가 들리면 쳐다볼 필요도 없이 죽을 사 자를 적는 거였다. 연필도 종이도 넘쳐났고 시라부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 글자를 적었는지 카와니시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하루에 적어도 열 번은 적었으니, 어림잡아 한 달이면 삼백 번, 일 년이면 삼천육백 번……. 확실히 그가 동경한다는 다쿠보쿠보다야 몇십 배는 많이 적은 셈이다. 그럼에도 시라부는 아직까지 목숨을 끊지 못했다. 질긴 생이고 질긴 명이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그렇게 되는 걸까. 그들은 자신들이 몇 번째 생존자인지도 몰랐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적어도 미야기 내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를 둘러봐도, 저기를 둘러봐도 좀비 떼였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것들은 동족을 잡아먹었고 다행히 개체 수는 점차 줄었지만, 그렇대도 여전히 시라부는 자살을 꿈꿨다. 따져 보면 바이러스가 돌기 이전부터 그는 지난한 삶을 살았다. 이혼한 부모,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아버지, 무능력한 형. 처음 자살을 계획한 나이가 열셋이니 말 다 했다. 4층에서 떨어진 꼬마는 죽기를 희망했으나 아쉽게도 등 아래엔 수풀이 있었고 어른들은 그 사건을 사고로 치부했다. 어린아이가 그런 지독한 생각을 품을 줄은 꿈도 꾸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애써 무시했거나. 첫 번째의 흔적은 종아리 뒤쪽의 짤막하게 긁힌 자국과 가끔의 절뚝임으로 남았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죽음보다는 관심을 목적으로 한 난도질은 이전보다 더 깊은 흉터를 남겼고 버릇이 되었다. 희미하게 흉이 나을 즈음 그 위에 새로운 선이 그어졌고 카와니시는, 그것만은 말려야겠다 싶었다. 손목을 쥐고 그 애 위로 올라탔을 때 보이는 찌푸린 미간이 싫었다. 사람은 자살로서 삶을 인정받는 것 같다. 자살한 예술가들의 삶은 조명을 받고 그들의 고단함은 입관 후에야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른다. 카와니시는, 시라부가 자살 자체를 동경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어쩌면 상관있어질 일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이 꼴 이 모양인 세상에서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었으므로, 한쪽이 무너진다면 다른 쪽이 어떻게 될지는 뻔하지 않은가. 타이치, 죽고 싶어. 어떻게 죽을까. 매번 방법을 되묻지만 카와니시는 늘 준비가 덜 된 채였다.
2-1. 목매달기 영화 등의 매체에서 자살을 표현하는 방법이라 하면 두 가지가 있겠다. 첫째는 화면이 전환되며 배경으로 깔리는 총성이고, 둘째는 로우앵글로 잡은 매달린 사람의 축 늘어진 발이다. 카와니시와 시라부가 계획한 첫 번째는 그 둘 중 후자의 방법이었다. 비슷한 계획을 지닌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학교 체육관에는 목매단 시체가 즐비하다고까지 말하기엔 힘들었으나, 아무튼 몇 구가 있었다. 아무래도 매달려 있다 보니 그것들의 표적이 되지는 못한 듯싶었다. 똑똑하네. 살점이 문드러지는 시체를 바라보며 시라부가 내뱉었지만, 곧 첫 번째 계획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시체가 역겹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건 카와니시도 동의하는 바였다. 하나같이 눈동자가 뒤집힌 상태에, 귀신 들린 마냥 혓바닥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모습은 미안하지만 끔찍했다. 그만하자. 난 좀 더…… 아름답게 죽고 싶어. 그런 방법이 있을 수 있나. 의문을 가지면서도 카와니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주일이 흘렀다.
2-2. 리스트 컷 켄지로, 이건 어때? 카와니시가 내민 것은 식칼이었다. 칼날은 무뎠고 더러웠다. 시라부가 인상을 썼다. 미쳤어? 이걸로 그었다가는 과다 출혈이 아니라 감염으로 뒈지겠네. 이러나저러나 끝은 같은 거 아닌가. 칼을 버리러 가는 뒷모습에 대고 시라부가 조용히 말했다. 너, 내가 손목 긋는 거 싫어했잖아. 베란다 아래로 떨어진 칼은 어쩌면 뭔가 죽였으리라. 칼에서 시선을 돌린 카와니시가 발을 옮겼다. 내가 이유 얘기해준 적 있었어? 아니. 안 궁금해? 응.
2-3. 투신자살 사실 카와니시는 떨어지는 칼의 궤적을 지켜보며 그 칼에 잠깐 자신을 투영시켰었다. 많이 아플까도 싶었지만, 떠오른 대안이 근처 대교였다. 아프지도 않고, 가장 확실히 죽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한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라면 근처 대교까지 가는 길에 몸이 안 남아날 거란 점이었다. 길거리에 살아 있는 시체가 즐비했다. 카와니시는, 한 군데라도 뜯어 먹히지 않고 대교까지 도착할 자신이 없었다. 2-4. 약물 자살 약국은 비교적 가까웠고 유리문도 깨져 있었다. 그러나 원하는 수면제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찾아 봐야 수면 유도제 따위였고, 그것은 자살에 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들고 늦게 일어나는 정도였다. 오후 세 시, 카와니시가 내뱉었다. 나 도저히 네가 자살하는 꼴은 못 보겠어. 켄지로, 넌 자살을 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그냥…… 죽고 싶은 거야? 자살은 아무래도 낭만적이지. 하지만, 그냥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낼 수 있으면 뭐라도 좋지 않을까. 왜, 날 창밖으로 던져 버리기라도 할 생각이야? 자조적인 웃음을 보지 않으려 카와니시가 눈을 꾹 감았다. 이제야 그는 준비가 다 되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 결론 아무튼 모든 자살 방법에 대한 논의는 포기로 귀결되었다. 켄지로, 정말 자살하고 싶어? 알면서 왜 물어. 별로 그렇지 않아 보여서. ……뭐? 네가 방금 몇 번째 死자를 적었는지도 모르잖아. 웃기지 마, 타이치. 사실은 살고 싶은 거…… 아니야? 시라부는 대답하지 않았고 카와니시가 말을 이었다. 복상사나 할까 봐. 섹스하고 싶단 거지, 그거. 난 아직 너를 많이 사랑해. 죽기엔 네가 눈에 밟혀서 안 되겠어. 그래, 키스해줘. 입술이 내뱉는 숨을 막았다. 자연스럽게 뒤로 기우는 연인의 몸에 동요하지 않으며 카와니시가 팔을 뻗었다. 이렇게 될 것을 언제부터 직감했는지 모를 확신에 찬 눈이 감기고서야 카와니시는 손에 힘을 줬다. 아래에서 버둥거리는 본능적인 움직임이 자신의 무게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밀어내던 손에, 저항하던 다리에 힘이 빠지고 나서야 그는 입술을 뗐다. 아직 남아 있는 미미한 온기는 괜히 눈물을 불렀다. 죽은 듯이 누운…… 아니, 죽은 애인을 옆에 두고 그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 애가 아팠을까. 내 손에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렇게 원하던 자살을 막은 게 나인데, 원망스럽지는 않았을까. 마지막 키스는 어땠을까. 카와니시는 베란다로 한번, 주방으로 한번 시선을 뒀다. 아무래도 시체는 같은 곳에 있어야 낭만적이겠지. 그래, 네가 그렇게 원하던 빌어먹을 낭만. 그는 어젯밤 주워 온 칼을 집어 들었다. 심장을 찌르면 많이 아프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여섯 시가 되면 죽어야지. 노을이 지는 방 안의 시체 두 구는, 적어도 살이 썩어 파리가 알을 까기 전까지는 낭만적일 것이다. 그 누구도 모를 게 당연했다. 2057년 10월 6일 여섯 시를 기점으로 인류가 멸종했다는 것을 기록할 생명체는 지구에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