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의 첫 만남은 시라부가 일자리를 구하면서부터였다. 후타쿠치는 마을에서 유명한 탐정이었고, 시라부는 일자리를 구하다가 탐정 보조를 구한다는 말에 찾아간 취업준비생이었다. 다테로 6번지, 후타쿠치 탐정사무소.
- 저, 탐정 보조 아직 구하시나요?
- 아, 일단 들어오세요.
둘의 첫 대화였다. 둘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후타쿠치는 지금 연쇄살인사건을 맡고있다고 말했다. 원래 사건을 맡은 도중에는 보조를 뽑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던 터라 오늘도 글렀구나, 하면서 돌아가려던 참이었지만 후타쿠치가 나가러던 시라부를 잡았다. 같이 일해봐요, 우리.
이야기 시작이었다.
2.
후타쿠치가 맡은 연쇄 살인사건은 꽤 악질적이라고 했다. 업무를 위해 설명을 듣고 있는데 범인이 하버드쯤 나왔을거 같다, 하는 생각이 들만큼 치밀했고, 계획적이었다. 뭐 안 그런 범죄가 어디 있겠냐 하지만 이번 사건은 유독 더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타쿠치가 이 분위기를 깨기 위해 꽤나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나머지 잡무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고, 일에 대한 큰 틀이 잡혔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시간이었다. 예쁘게 지는 노을을 창문 옆자리에 앉아서 바라보던 후타쿠치가 저를 바라보며 물어왔다.
- 집이 어디예요?
- 아 저 바로 뒷골목이에요. 가깝습니다.
- 아 진짜? 그럼 다행이고요~ 여기 밤 되면 되게 깜깜하니까 조심 하라고 하려 했는데, 동네 주민이니까 더 잘 알았겠네요, 나 완전 꼰대처럼 보였겠다
- 네? 아니에요. 걱정해주신건데요 뭐. 그럼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 내일 봐요-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켜지는 가로등을 보며 여기 밝은데, 하는 별거 아닌 생각들로 길거리에 자리잡은 적막을 대신했다. 생각들은 조명의 밝기와 일하게 된 사무실, 후타쿠치, 오늘 해야할 일 등이 대부분이었다. 그냥 일상의 일부를 생각한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생각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여유는 얼마 없을 것 이라는 걸 알아서, 지금 같이 골목을 걷는 시간이 좋았다. 주머니에 있던 집 열쇠를 돌리며 가로등이라는 인위적인 불빛이 밝히는 길을 걸었다. 기분 좋은 밤이었다.
3.
다음날 제시간에 맞춰서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차피 직원이라고는 대표인 후타쿠치 밖에 없지만 첫인상이 중요한 거라고 했으니 밝게 인사하고는 제 자리로 향했다. 시라부씨도 좋은 아침- 하며 인사를 받아준 후타쿠치가 좋아하는 차가 있냐고 물었다. 마침 차를 주문하려던 참이니 좋아하는 차 종류가 있으면 말하라면서 생색내듯이 말하는 후타쿠치에게 그냥 얼그레이면 된다고 얼버무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깨끗한 책상에 놓 사건에 대한 서류들이 철 되어 있는 파일을 들어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 범인은 20대 추정, 항상 같은색의 잉크로 범인 스스로에 대한 힌트를 남기고 있으며 7명의 피해자가 생길 것이라고 예고했다. 현재까지는 4명이 살해된 상태. 나온 힌트들은 너무 난해해서 풀지 않는 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고, 수사 담당은 미야기현을 관할하는 경찰서이지만, 경찰들 대신 후타쿠치가 수사권을 위임 받아서 하고 있다. '
큼직큼직한 정보들부터 자잘한 정보들까지, 검정색 잉크로 일정한 간격을 두며 적힌 단어들의 의미를 곱씹었다. 첫날이라 이것저것 할 것이 많아 웬만한 일을 다 끝내고 보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첫 출근이라는 부담감에 하루 종일 긴장하고 있었더니 없던 두통이 다 생기는 느낌이었다. 대충 목을 돌리며 뻐근함을 해소하려 하고 있을 때 책상에 비타민 음료가 놓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역시 후타쿠치가 웃으며 서있었다.
- 아 탐정님 뭐 필요하신거 있으세요?
- 아, 아니에요. 첫 출근 어땠어요?
- 조금 긴장되기도 했는데 이제 좀 적응한거 같아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 아니에요- 오늘 첫출근이라 피곤할텐데 우리 이만 퇴근해요. 내일 봐요 시라부씨.
- 아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뭐야, 성격 더럽다고 했는데 은근 잘 챙겨주네, 하고 시덥지 않게 생각한 시라부가 집으로 향했다. 후타쿠치는 동네에서 유능한 탐정으로 유명하지만 성격이 더럽기로도 유명하다고 했다. 짜증을 내는 성격은 아니지만 웃으면서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재주가 있다고 들었는데, 헛소문인가보네. 하며 가로등이 켜진 길을 걸었다. 하루가 빠르게 지나간 느낌이라 오늘 뭘 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내일 해야할 일은 내일 생각해야겠다며 멍한 채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가서 겉옷을 옷걸이에 걸어둔 시라부가 책상에 앉아서 잔뜩 어질러진 서류들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깨끗한 종이에 계획들을 적었다. 이것저것 할게 많은 시라부에게는 습관이 되버린 일이었다. 회사와 관련해서 해야할 일을 적다가 후타쿠치를 생각했다. 그가 대충 사건의 윤곽을 잡아내고 있는 것 같아 보였으니, 나도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만으로도 피곤해지는 느낌에 시라부는 쓰고있던 만년필의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동안 긴장으로 찌뿌둥해진 몸을 스트레칭하고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 으, 내일부터 빡세겠네- '
*
몇일 뒤 출근한 시라부는 얼마전의 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사무실에는 이른 아침부터 경찰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했고 그 많은 경찰들 사이에서 제 상사는 어제 밤에 일어난 사건 브리핑을 듣고 있었다. 그런 후타쿠치를 잠시 쳐다보다가 자리에 가방을 두고 후타쿠치의 옆에 선 시라부가 경찰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였다.
- 어제 밤에 한 남성이 살해되었습니다. 피해자는 술에 취한 상태였으나 많이 마신 것 같지 않아보이고, 현재 사건 현장에서 몇몇 경찰들이 사건 보존을 위하여 통제중에 있습니다. 피해자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자영업자였고, 좋은 성격탓에 누군가의 미움을 산적은 없다는 주변인들의 진술을 받은 상태이고, 채무가 밀려있던 것으로 추정되나 최근 청산하였다고 합니다.
- 알겠어요. 이만 해도 될 것같아요. 다들 서로 복귀하시고 팀장님하고 시라부씨만 같이 현장 나가도록 합시다. 다들 빨리 움직이죠.
- 예!
사내들의 우렁찬 대답소리에 주춤한 시라부가 자리에서 수첩과 펜을 챙겨 후타쿠치의 차로 향했다. 사건 현장으로 가는 동안 후타쿠치는 말이 없었고 시라부도 딱히 말을 걸려고 하지 않았다. 경찰은 그저 서류를 확인하는데에 집중했고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멈춰섰다. 안전벨트를 푸르고 내리는 둘의 눈치를 보다가 같이 내려서 확인한 현장은 처참했다. 피해자가 총을 맞고 쓰러진 그대로였으니 꽤나 혼란스러운 현장이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안전제일, 이라 써진 노란색 띠 안으로 들어간 후타쿠치와 시라부가 사체를 확인했다. 키도 보통, 체격도 보통인 남자였다. 머리에 총상이 있고 다른 상처들은 없었고, 하얀색 티가 붉은색으로 조금 물들어있었다. 피해자를 유심히 살피던 시라부가 후타쿠치에게 말을 건내는데에는 조금의 용기가 필요했다.
- 저 탐정님, 왠지 이상한 것같아요.
- 어떤 부분이요?
- 피해자의 옷을 보면, 구김도 거의 없고 피가 묻은 것도 흐른 피에 묻었지 총에 맞을 때 튀긴 피는 없는 것 같아요. 보통은 튀기 정상인데 티의 앞면은 거의 깨끗하잖아요. 그리고 옷 옆의 작은 택에, 힌트라고 적혀있으니까 이 옷은 피해자가 원래 입고 있던 옷이 아니라 피해자가 죽고나서 범인이 갈아 입힌 것 아닐까요? 힌트를 줄려고 말이에요.
- 일리 있네요. 잘 발견하셨어요 시라부씨. 역시 내 탐정 보조네-
하고는 칭찬해주는 후타쿠치에 조금 얼굴이 붉어진 시라부가 노트에 '갈아입힌 흰색 옷, 블루블랙색의 잉크로 상표에 적혀진 Hint. ' 라고 빠른 속도로 적어내고는 후타쿠치를 거들며 시체를 살폈다. 어느 정도 수색을 마친 건지 후타쿠치가 쪼그려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에 따라 시라부가 일어나려고 했다. 너무 오랜시간 쪼그려 앉아 있어서 그런지 일어나면서 휘청한 시라부가 넘어지려는 것을 잡아서 끌어당긴 후타쿠치 덕에 휘청이던 시라부가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섰다.
- 아..! 감사해요. - 조심해요- 괜히 넘어져서 다치지 말구요.
츤데레가 탐정님의 컨셉인가, 싶었던 시라부지만 어쨌든 멋있었던지라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하고는 후타쿠치를 따라 차에 탑승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둘만 탄 차 안에서, 시라부가 운전하고 있는 후타쿠치를 바라봤다. 후타쿠치가 저를 챙겨주는 것 같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는데, 오늘과 예전을 돌아보니 확실히 저에게 관심을 갖고 챙겨준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후타쿠치를 바라보던 시라부가 무의식적으로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왜? 라며 생각했다.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후타쿠치가 계속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그러면 안되는 관계에 있으면서도, 후타쿠치가 좋아졌다. 계속 저를 바라보는 시라부의 시선을 인지한 후타쿠치가 장난스레 물었다. 왜요, 그렇게 잘생겼어요?
- 네.. 네? 아니 네..!
- 뭐에요 왜 당황해요- 진짜인가보네!
- 네 뭐 잘생기시긴 하셨으니까요
- 시라부씨 솔직하시네요. 시라부씨도 잘생긴거 아시죠?
- 아뇨 뭐.. 아니에요
- 와 겸손하기까지 하면 너무 완벽한데!
- 에이, 정말 아니에요.
후타쿠치가 시라부의 반응을 살피다가 물었다. 혹시 애인있어요?
" 아뇨, 애인은 커녕 저 좋아해주는 사람도 없어요. "
" 왜요, 좋아하면서 들이대는 사람 한명 있지 않아요? "
" 네..? 딱히 없는데..? "
" 와, 내가 얼마나 티내고 다녔는데 몰라요! 제가 얼마나 시라부씨를 좋아하는데 "
" .....네? "
" 시라부씨 좋아한다고요,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시라부씨 은근 눈치 없구나! "
" 아.. 상상도 못한 일이라서요.. "
" 그래서 시라부씨는 어때요? "
" 네? 뭐가요? "
" 저 어떻냐구요- "
" 아.. 후타쿠치씨 좋은 분이죠.. "
" 애인으로도 좋은 사람일 것 같아요? "
" 당연하죠- 엄청 다정하시잖아요 "
" 시라부씨 좋아해요. 엄청. 이건 사람이 좋다는 것도 있지만 애인이 되어달란 말이에요. 시라부씨 말처럼 애인으로도 좋은 사람인거 변하지 않을게요 "
" ..... "
" 미안해요, 분위기 좋았는데 내가 망친것같다 "
" 아니에요, 좋아요."
"네? 뭐가요? "
" 저도 후타쿠치씨 좋다구요. "
새로운 시작이었다.
4.
그렇게 둘은 연애를 시작했다. 사무실에서도, 퇴근 하고 나서도 붙어 있는 둘은 급속도로 감정을 키워나갔다. 같이 공연을 보러가기도 하고, 퇴근 후 저녁을 먹으러 가기도 하면서 평범하게 연인들이 하는 데이트 코스를 따랐다. 마주보고 파스타를 먹기도 하고 같이 전망대에서 야경을 즐기기도 하고, 재밌는 영화도 보고, 같이 카페에서 음료수를 마시기도 하고 평범하게 산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은 한정돼어 있었고 둘에게는 시간내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시는 사건 추리였고 이성을 지배한 감정은 본업을 미루게 했다. 자각하기 전까지는 좋았다. 제 연인과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고,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조금은 나중에 해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은 결국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6번째 희생자가 나왔고, 후타쿠치와 시라부는 각자의 죄책감에 억눌렸다. 그 후로부터는 둘 다 서로보다는 일에 치중했다. 데이트보다는 추리가 먼저였고, 밥을 먹기보다는 사무실에서 밤을 지새는 나날을 보냈다. 피해자는 자영업자라고 했다. 도시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에서 내려오면 바로 보이는 식당의 주인 이라고 했다. 둘이 전망대에서 야경을 보고 왔었던 식당이었다. 현장 수색을 위해 그 레스토랑을 다시 방문했을 때, 둘은 알 것 같은 죄책감을 느꼈고 후타쿠치는 한것 우울해진 표정을 한 시라부의 손을 잠시 잡았다가 놔주었다. 그리곤 피해자가 쓰러져 있는 곳을 확인했다. 전과는 다르게 피해자의 사체에 특이사항은 없어보였고, 이번 힌트는 옆에 있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엽서였다. 블루블랙색의 잉크로 ' Restaurant ' 라고 써진 엽서를 주워든 후타쿠치가 시라부와 함께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의 적막한 공기가 둘의 어깨를 짓눌렀고, 후타쿠치가 애써 그 적막을 깨려 말을 걸었다.
" 네 탓 아니야 "
"..네"
애써 웃어보인 시라부에게 작은 꽃 한송이를 내민 후타쿠치가 밝게 웃었다.
" 그냥, 우리 요즘 서로한테 신경 못 쓴 것 같아서~ "
" .. 예쁘네요, 잘 꽂아 둘게요 "
" 응, 조심해서 들어가 "
집에 들어온 시라부가 집에 있는 꽃병에 꽃을 꽂아서 제 책상으로 향했다. 만년필, 여러 색의 잉크 카트리지, 사건을 조사한 자료들, 수첩이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 하긴 요즘 집에 잘 안들어가긴 했지, 사무실에서 살았으니까- 하면서 주말에 출근 안하면 치워야겠네. ' 생각을 마친 시라부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달 마저도 조용한 밤이었다.
5.
힌트를 사무실 중앙의 화이트보드에 쭉 붙여두고는 범인이 누군지를 밝혀내는데 치중하고 있었다. 범인이 예고한 살인 사건의 피해자수는 7명이다. 범인의 말대로라면 이제 한명의 피해자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범인을 검거해 피해자를 줄여 보고자 하던 둘이었지만, 인생은 항상 예고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는 했다. 그날 저녁 시라부는 심각한 두통에 시달렸고 버티다 버티다 결국 한참 예민해진 후타쿠치에게 다가갔다. 저, 탐정님. 하고 운을 뗀 시라부가 지금 자신의 상태를 전했고, 후타쿠치는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얼른 가보라는 말로 시라부를 퇴근시켰다.
" 미안해, 아픈것도 몰랐네. 들어가서 푹 쉬고 내일까지 푹 쉬어 "
" 감사해요, 먼저 들어갈게요 "
" 응 조심히 들어가- "
"아, 그런데 힌트는 아직도 잘 안풀려요? "
" 응 뭔가 알아낼 것 같은데 모르겠어.. "
"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생각해봐요. "
시라부가 사무실을 나서면서 주제 넘게 들릴지도 모르는 조언을 전했고, 후타쿠치는 의미를 곱씹었다. 후타쿠치가 본인을 주제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을 알아 한마디 던져본 것이고,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뻗어버린 시라부가 생각을 멈추고 잠에 들었다. 한편, 후타쿠치는 그 시간에 계속해서 힌트들과 시라부의 말을 생각했다. 흰색 옷, 레스토랑, 그리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후타쿠치가 고민하면서 종이에 세가지를 써보기 시작했다.
' 흰 옷, 白衣. 흰 색, 白. '
' 레스토랑, 전망대 아래. 시라부와 같이 갔었던 식당. '
그리고, 모든 가능성. 시라부의 이름을 생각한 후타쿠치가 힌트를 정리해 둔 종이에 시라부의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 白布 賢二郎 '
시라부의 시라가 흰 백자라는 것을 기억해낸 후타쿠치가 복잡한 머리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속으로 시라부가 범인임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무의식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된 거겠지. 그래서 시라부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보라고 했구나. 그런데, 왜? 굳이 왜 자기가 범인인걸 알아차리라고 힌트를 준거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조그만 희망이 깨져버린건 혹시나 해서 가본 시라부의 책상에 놓여진 엽서였다. 같이 전망대에 갔을 때 시라부가 샀던 엽서였다. 조심히 접혀 있는 엽서를 집어들어 열어본 후타쿠치는, 시라부의 필체로 정갈히 적혀있는 글자를 속으로 읽어 나갔다.
" THE LAST TARGET, YOU "
범인은 시라부였고, 7번째 희생자는 후타쿠치 본인이었다.
6.
다음 날 후타쿠치는 출근하지 않은 시라부의 자리를 하루 종일 노려보고 있었다. 제 애인이 범인인 것이 확실해졌지만 조금의 희망이나마 가져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어제의 그 엽서는 본인이 내려두었던 상태 그대로 책상에 올려져 있었고, 그 옆에는 엽서에 글을 쓰는데 이용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년필이 놓여져 있었다. 어제는 충격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물건 중 하나겠지, 싶었다. 시라부는 아마 내가 범인을 알아차렸다는 걸 알고 있겠지, 그런데 왜 알려준걸까. 하루 종일 의문만이 맴돌았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죽을 사들고 시라부의 집 앞에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왜 알려줬는지, 범인에 대해 눈치를 챘다는걸 시라부가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문 옆에 조그맣게 자리한 초인종을 누른 후타쿠치가 문을 열기를 조금 기다리면, 정말로 아파서인지 살이 빠진 듯한 모습의 시라부가 후타쿠치와 마주했다.
" 콜록- ..어쩐일이에요 "
" 아무것도 못 먹었을 것 같아서 죽이라도 사왔어, 많이 아파? "
" 괜찮아요, 추운데 들어와요 "
시라부에게 죽을 건내고 방으로 들어온 후타쿠치가 겉으로는 티내지 않고 방을 훑어보았다.
" 방 둘러봐도 돼요. 몰래 볼 필요 없는걸요 "
" 아.. 응 "
눈치 챈건가, 싶었지만 시라부는 여전히 태연했고 저에게 방을 둘러보라는 여유로운 말 까지 건냈다. 그래, 그냥 범인이 시라부 자리에 두고 간 걸수도 있어. 범인이라는 힌트는 그냥 내가 추리한거니까 확실하지 않아, 그래. 애써 자기합리화를 시키며 시라부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전에 시라부에게 건냈던 꽃이 얇은 꽃병에 예쁘게 꽂혀있었다.
" 꽃, 꽂아뒀네? "
" 네, 후타쿠치씨가 줘서 그렇기도 하고, 저 저꽃 좋아하거든요. 노란색 튤립. "
" 좋아해서 다행이야, 그나저나 만년필이 되게 많네? "
조금은 긴장한 채 물어본 답변에는 잠시의 공백 뒤 답변이 왔다. 네, 좋아해요.
" 만년필 모으는구나, 나중에 선물할 때 참고할게 "
" 고마워요, 차라도 마실래요? "
" 홍차면 돼. 같이 마시자 "
알겠다며 주방에서 차를 타고 있는 시라부를 주방 타일에 비친 모습으로 지켜봤다. 시라부는 저가 안보이지만 저는 시라부가 보이는 위치에서 본건, 시라부가 조용히 총을 장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7.
총을 장전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본 후타쿠치가 애써 티나지 않게 평소의 텐션을 유지했다. 총을 숨기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와 함께 저의 앞으로 온 시라부를 보고 후타쿠치는 오늘이 사건의 종결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몇년 간 탐정 생활을 하면서 익힌 감이었다. 차를 제 앞에 내려두는 시라부에게 고맙다는 형식적인 인사를 마치고 시라부와 후타쿠치가 마주 보고 앉았다. 이제, 진실과 마주할 시간이다.
" 시라부, 왜 마지막 타겟이 나야? "
".. 알아냈네요, 그럴 것 같았어요 "
" 대답해줘. "
" 그 마지막은 제가 정하는게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가 정하는거지. 내가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안돼요"
" 어차피 나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말해주면 안돼? 아버지 얘기던 만년필 얘기던 "
" 미안해요. 이것도 내 자유가 아니에요. "
"... 그래 "
말을 마치고 차를 한모금 마셨다. 차 맛있네, 어디거야?
" 저도 몰라요. 아버지 부하직원 1이 사다둔 차니까요. "
" ...응 "
마지막 대화일 것이라 생각했고, 그런 후타쿠치의 감은 맞아 떨어졌다. 차를 담은 잔을 테이블에 내려두는 조심스러운 행동을 끝 마치자, 시라부는 잘 장전된 총을 꺼내들고 후타쿠치의 머리에 겨눴다. 조용한 적막이 방 안을 가득 채웠고. 둘은 눈을 마주친 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상태에 변화를 준 것은 시라부였다. 시라부가 후타쿠치에게 겨누고 있던 총을 내렸다.
"... 그냥 가 "
" ... "
" 앞으로는 시라부 켄지로라는 사람 잊어버리고 살아주세요. 미안해요 "
" 시라부. "
" 제발 그냥 가라고, 제발. 내가 힌트를 왜 알려줬다고 생각해 "
" ... "
" 너 도망가라고 해준거잖아! 내가 범인인 것도 알았고 너가 마지막 타겟인 걸 알았으면 바로 도망갔어야지! 네가 우리 집에 왔을 때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고, 여길 왜 와. "
" 내가 왜 너를 두고 도망을 가. 시라부 네가 살인자건 무슨 마피아건, 내 애인이잖아 "
" 안 온걸로 해. 얼른 가. "
" 나 가면 너 곤란해지잖아. "
" 너 안가면 너가 죽을 거라는 생각은 안들어? "
하아, 이래서는 끝도 없지. 조용히 내뱉은 시라부가 총을 소리나게 바닥에 던졌다. 오늘 여기 못본걸로 하고, 다른데 가서 조용히 살아. 제발, 부탁이야. 그리고, 시라부가 던져 놓은 총을 주워든 후타쿠치가 자신의 옷을 사용해서 시라부의 지문을 문질러 닦았다.
" 내 마지막이 너에겐 시작이길 바래, 켄지로 "
그 때 후타쿠치는 해사하게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타앙- 소음기를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가 울렸고, 동시에 후타쿠치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후타쿠치가 제 앞에서 죽었다, 믿기지 않는 사실을 눈 앞에서 접한 시라부가 쓰러진 후타쿠치를 끌어 안고 울음을 토해냈다. 왜 너가 희생해야 하는건데, 왜. 시라부는 끝 없이 울음을 토해냈고, 그날 밤은 끝도 없이 길었다.
7.
다음 날, 동네 신문의 헤드는 ' 탐정 후타쿠치, 자살 ' 이라는 자극적인 기사였다. 시라부는 더 이상 쏟을 눈물이 없을 정도로 울어댔고, 사무실의 앞에는 후타쿠치에게 조의를 표하는 많은 동네 주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눈가가 짓무른 시라부를 위로하며 본인들의 집으로 돌아갔고, 무언가가 이끄는대로 사무실로 들어간 시라부는 익숙한 둘만의 공간에 남은게 혼자임을 새삼 느꼈다. 둘의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지만, 지금 여기 있을 수 있는 건 본인밖에 없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게 다가왔다. 후타쿠치와의 추억이 너무 많은 공간이다. 같이 차를 마셨고, 같이 회의를 했고, 다정한 연인들 처럼 쇼파에서 영화를 보기도 했고, 제가 남긴 힌트들은 화이트보드에 아직 붙어있었다. 후타쿠치의 자리에는 후타쿠치가 있을 것만 같았지만, 항상 후타쿠치가 앉아 있던 의자는 허전하게 비어있었다. 제 자리에 가보니 예쁜 야경이 그려진 편지봉투가 놓여져 있었다. 시라부에게, 라고 장난스러운 필체로 쓰여진 편지는 후타쿠치가. 로 끝이 났다.
편지를 가방에 소중하게 넣었다. 그리고는 편지 한통을 제 자리에 두고 캐리어를 끌고 나갔다. 저렇게 두면 나중에 아버지의 부하 3 정도가 가져가서 아버지께 전할 것이 뻔했다. 여권도 챙겼고, 짐도 이미 보내두었다. 이제 공항으로 가기만 하면 되나, 시라부가 해가 쨍쨍하게 뜬 거리를 걸었다. 후타쿠치의 부탁을 기억하고 있다. 기억이 안날 수가 있나,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데. 후타쿠치의 마지막은 시라부의 시작이었으니까.
***
Behind. 시라부의 배경.
시라부가 만년필을 모으는 이유는 나만의 무언가라는 존재가 주는 위안 때문이었다. 조직을 운영하는 아버지 아래에서 시라부는 나만의 사람,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조그마한 자신의 무언가에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내가 쓰는대로, 내가 쓰는 습관대로 촉이 마모되어 나만의 펜이 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으니까. 마지막 타겟에 대한 정보를 받았을 때도 시라부는 몇년간의 습관으로 체념하고 엽서를 썼다. you.라고 써있는 엽서를 제 손으로 전한다는게 너무나도 싫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벗어나는 걸 시도하게 해준 것이 후타쿠치의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