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일곱 시 삼분, 오후 일곱 시 사분……, 창밖에 밝은 볕이 다 꺼진 마당에, 후타쿠치는 일어나자마자 늘어지게 겨우 하품했다. 지루해. 그는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며 바닥에 턱 끝과 배를 붙이고 엎드렸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소파에 등을 기댔다. 드문드문 들리는 고요한 발자국 소리를 마냥 좋은 노랫소리인 것처럼 매번 챙겨 듣다,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니는 시곗바늘을 두 번이나 더 확인했다. 오후 일곱 시 구분, 십분, 아직 시라부가 집에 도착하려면 긴 바늘이 한 번 정도 더 돌아야 했다.
더 이상 잠들려고 했던 시도도 지겨웠던 후타쿠치는, 결국 옷가지를 챙겨 입으며 오후 내리 자느라 밀려있던 알림들을 대충 밀어 올렸다. 시라부, 시라부…, 그는 오랜 시간 쌓인 부재중 통화 속에서 겨우 익숙한 이름을 발견해냈다. 음성, 음, 응? 뭐가 있다는 거야. 앞 내용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신경질적으로 확인 버튼을 눌렀다. 곧 흘러나오는 시라부의 목소리, 후타쿠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조금이라도 더 크게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 귓가에 핸드폰을 있는 대로 들이밀었다.
[ 후타쿠치, 아직 자고 있어? 나 오늘 좀 늦어. 냉장고에서 좋아하는 거 꺼내서 챙겨 먹고 있어. ]
후타쿠치는 나름 한 번에 알아들은 말도 그렇지 않은 척 여러 번 돌려 재생했다. 그다음에는 연락 수단이 생기고 나서부터 꼬박꼬박 쌓아뒀던 음성 메시지를 틀고, 또 틀고, 다시 또 틀었다. 기약 없는 발소리에 하루가 다 가도록 주의 깊게 집중하는 것보다는 더 신이 나는 일이었다. 음성 메시지지 한 건이 있습니다. 그는 잠시 까먹었던 말도 다시 배웠다. 그간 나눴던 대화 내용도 모조리 읽어낸 뒤에야, 살랑거리는 꼬리를 겨우 진정시키며 마음이 급해 차마 넘겨짚었던 오늘 도착한 내용을 곱씹었다. 오늘, 좀 늦어, 냉장고에서, ……, 그는 방금까지 제 연인의 잔잔한 목소리를 들으며 기쁨에 흘렀던, 어두운 나무줄기 빛 꼬리털이 빳빳하게 서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일찍 올게. 잠에 취해서 허덕이는 제게 키스해주던 얼굴이 억울할 정도로 그리웠다.
[보ㅓ거서피다] [보구ㅜ시프] [어ᅟᅥᆫ제오ㅓㅏ]
후타쿠치는 되는대로 지껄인 내용을 망설임 없이 전송했다. 몇 분이 지나도 읽음 표시는 없었다. 전원을 꺼뜨리고 부러 씩씩대며 냉장고로 향했다. 시라부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 줄 알았다. 그래서 일찍 온다는 줄 알았고, 억지로 잠들면서까지 내내 기다린 보람은 결국 헛고생이 되어버렸다. 일찍 온다면서.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밥도 먹기 싫어, 망할 주인. 결국, 억지로 혀를 씹었다. 심통이 난 마음이 일부러 더 멋대로 굴도록.
그는 허전한 바지 주머니를 괜히 뒤적이며 시라부가 아침에 챙겨놨던 고깃덩이를 질겅질겅 씹었다. 지난 새벽에 서랍 안쪽 숨겨놨던 담배는 또 어떻게 찾아낸 건지, 반나절이 넘도록 텁텁한 입안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편의점에라도 갈까 싶었는데 하필 또 남아있던 돈도 없던 참이었다. 작업료 들어오려면 한참 멀었는데. 죄다 마른 입술 조각을 같이 씹어 삼키며, 후타쿠치는 땅이 꺼질 듯 힘껏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올까.
그는 부스스하게 간질이는 귓가를 꾹꾹 누르며 무심코 제 키 높이보다 낮은 허연색 찬장을 밉도록 흘겼다. 하루에 세 봉지만 먹어, 이 이상은 안 돼. TV를 틀어놓고도 지루함을 못 참아 흐릿해지던 눈앞에, 까치발까지 서며 맨 위 칸에 젤리 통을 밀어 넣던 시라부의 뒷모습이 퐁퐁 피어올랐다. 후타쿠치는 곧장 일어나서 젤리가 가득 들어있는 개수대 바로 위의 찬장 문을 열어젖혔다. 그는 형형색색의 젤리를 입안에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텅텅 빈 봉지를 일부러 바닥에 툭 버렸다. 삐딱해진 심보가 여간 미운 게 아니었다. 그는 양껏 쌓인 반질반질한 금색 봉지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코웃음 쳤다.
“ 나 왔어. 아직 자? 후타쿠치? ”
힘이 쭉 빠진 목소리는 느릿하게 제 연인을 찾았다. 자정이 넘은 시곗바늘, 이쯤이면 진작 말똥말똥한 얼굴로 현관 앞에 서서 왜 이제 왔냐며 삐뚤어진 목소리로 되묻는 게 늘 그런 패턴이었다. 다행히 담배 냄새는 안 나네. 그는 출근 준비 도중 찾아냈던 담배 뭉텅이가 여전히 제 가방 구석에서 뛰놀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자각했다. 시라부는 퉁퉁 부은 발을 갑갑하게 죄고 있는 구두를 툭 벗어 정리하며 방으로 들어가는 찰나에 집안을 대충 훑었다. 엉망으로 풀려 죄 발톱 자국이 난 채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휴지 뭉텅이와 셀 수 없이 흩뿌려진 빈 젤리 봉지들. 시라부는 텅 빈 행거와 그 밑에 어지럽게 쌓인 옷들을 발로 걷어차며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 큰 덩치가 이불 속에 콕 박힌 채 겨우 숨겨진 꼴이 우스웠다. 채 덮이지 못한 이불 틈으로 몽실몽실 튀어나온 꼬리털, 잔뜩 심통이 난 듯 씩씩거리는 숨소리. 시라부는 매섭던 이른 봄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갈히 털어내며 낮게 비아냥거렸다.
“ 너 진짜 개새끼야? 휴지는 또 왜 저래? ” “ ……. ” “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약속도 안 지키고 죄다 뜯어먹어 놨냐고. 야, 일어나. ”
타이밍이 채 안 맞아 보기 좋게 지하철 막차를 놓친 시라부의 기분은 사실 최악에 가까웠다. 모두 눈치 게임에 실패해 답답한 방석 위에 억지로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있던 꼴이란. 시라부는 난생 최악의 회식 자리를 되삼키며 질색했다. 옆에 앉아있던 사람들 눈치를 겨우 봐가면서 보낸 연락들은 죄다 먹통이었고, 내내 걱정이 되어서 동기들과 함께 저마다의 핑계를 대며 빠져나온 술집 밖 풍경은 우습게도 별 한 점조차 박혀있지 않은 시리고 거뭇한 밤하늘이었다. 야, 지하철 막차 끊겼어! 동기의 허무한 말에 시라부는 쯧 혀를 차며 주변을 둘러봤다. 엉망으로 보낸 보고 싶다는 메시지와 늦어진 귀가가 나름 미안해서 택시가 잡히는 동안 편의점에 들러 내일 아침 먹을 죽과 후타쿠치가 늘 노래를 부르던 달곰한 것들을 한 아름 집어서 계산해 포장했다. 보고 싶다. 택시에 내려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내내 했던 생각이었다. 두툼한 코트 주머니 속 들어있는 반지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며 문을 열기 전까지도. 물론 난장판이 된 집안 꼴에 금세 반쯤 사그라지기는 했지만.
“ 다 치워놔, 전부.”
후타쿠치는 어질러진 거실과 부엌 바닥을 치우는 내내 사람으로 돌아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듯했다. 귀와 꼬리가 안쓰러울 만큼 축 늘어져서 고롱고롱 숨소리를 내뱉는 동안, 시라부는 샤워를 하고 나서 쓰린 속을 대충이나마 달래려 투명한 유리컵에 단 냄새가 풍기는 꿀 두 숟가락을 덜어내는 중이었다. 옷도 똑바로 걸어놔, 전부. 물론 그는 봐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뜨거운 물을 붓는 동안 방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진짜 사춘기인가. 근데 이제 와서? 시라부는 진지하게 고민하며 간질거리는 목덜미를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손바닥으로 대충 문질렀다.
하얗게 서린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익숙한 라디오를 주파수를 맞추는 시간, 시라부는 술기운 때문인지 졸린 눈을 연신 비벼댔다. 혹여나 오늘은 사연이 당첨되었나 싶어서, 이미 반쯤 감겨있던 눈꺼풀을 몇 분 간격으로 꼬박꼬박 뜨던 시라부는 잔잔한 소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소파에 뺨을 덜컥 붙였다. 머리 안 말리면 감기 걸리는데. 아, 방에 들어가야 하는데. 생각이 다 끝나기도 전에 폭신한 이불이 대뜸 덮어졌다. 소파 밑에서 옅은 인기척도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라부는 눈을 채 뜨지 않고 삐져나온 어깨까지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뺨을 간질이는 머리칼과 헤매는 손에 깍지 끼워진 따듯한 온기와 고요한 숨소리, 이따금 속눈썹이 깜빡여지는 소리, 여전히 쓰린 속. 사실 그게 전부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속을 모조리 게워냈다. 차가운 물로 세수까지 마치고 나서야 시라부는 어기적어기적 화장실에서 기어 나오듯 했다. 좆같네. 그는 렌즈 대신에 벗어뒀던 안경을 쓰고, 부슬부슬해진 앞머리를 한 대 모아 묶으며 어제 편의점에서 샀던 죽을 꺼냈다. 심플한 로고가 찍혀있는 편의점 봉투는 여전히 부스럭대는 것도 모자라 한껏 묵직했다. 내가 왜 이렇게 많이 샀더라. 시라부는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과자나 사탕 봉지를 집어 들며 몽글몽글한 술기운 탓인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집어 담았던 지난밤의 자신을 가볍게 자책했다. 아, 이건 좀 심했다. 제 머리통만 한 젤리 봉지 서너 개. 그제야 타이밍을 놓쳐 전해주지 못한 반지가 기억났다. 시라부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는 소파 밑에서 고롱고롱한 숨소리가 이어지는 후타쿠치 위에 어젯밤 제가 덮고 자던 이불을 꼼꼼히 덮어줬다. 아마도 점심때까지 늘어지게 잠들어있겠지. 그는 찬장에 어젯밤 사 온 간식거리를 대충 밀어 넣었다.
아마, 후타쿠치가 일어난 건 정말 점심때쯤이었을 것이다. 전자레인지에 시간을 맞춰 데웠음에도 밑바닥이 검게 그을린 죽을 억지로 입안에 넣고 나서 평일 동안 밀렸던 드라마를 세 편 정도 몰아본 뒤에야 거실에서 낮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쾅, 쾅, 밖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두 번 정도 들렸다. 아마 씻으러 화장실에 갔다가, 옷이 있는 방에 제가 있으니 들어올지 말지 고민한 것 같았다. 시라부는 후타쿠치가 다시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에 새 속옷과 겉옷을 문 앞에 내려 두었다.
“ 후타쿠치. ” “ ……. ” “ 야. ” “ ……. ” “ 켄지. ” “ ……. ”
대답 안 해? 시라부는 다시금 화장실 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깨에 감긴 팔을 억지로 풀어내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 너도 약속 안 지켰잖아. ” “ 내가 무슨 약속을 안 지켰는데. ” “ 일찍 온다며. ” “ 좆 까, 개새끼야. 나도 일찍 오고 싶었어. ” “ 난 개새끼 아니라고! ”
억울함에 가득 찬 으르렁거림에 시라부는 질색했다. 네가 일찍 오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잠도 일찍 자고 계속 기다렸는데. 바스락거린 물기 가득한 머리칼마저도 여전히 축 처져 있었다. 시라부는 축 늘어진 귀가 마냥 보이는 것 같은 기분에 얇은 손가락을 조심스레 세워 가만히 머리칼 사이를 스쳤다. 방금 씻고 나온 탓인지, 제대로 수건질 하지 않은 머리는 아직 축축했다. 침대에 앉아. 머리 말려줄게. 다행스러운 건지 모르겠으나, 한층 누그러져 있는 목소리에 후타쿠치는 얌전히 침대에 앉았다. 웅웅거리는 소음이 영 듣기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후타쿠치는 잠자코 앉아서 제 머리카락 사이에서 나른하게 뛰노는 손가락을 가만히 내버려 둔 채 고롱거리는 소리를 냈다. 곧이어 앞머리를 말리기 위해 돌아앉은 후타쿠치는 뜨뜻해진 이마 자락을 문지르며 시라부를 빤히 내려다봤다.
“ 너무 뜨거워. ” “ 조금만 기다리면 끝나. ” “ 거짓말쟁이. ”
시라부는 무심한 표정으로 드라이기 입구를 후타쿠치의 얼굴에 바짝 붙였다. 아, 뜨거워! 외마디의 비명을 끝으로 내내 귀를 못살게 굴던 소음이 사라졌다. 거짓말쟁이, 약속도 안 지키고. 맨날 거짓말하고. 우습게도 그는 또 잔뜩 심통이 난 상태였다.
“ 밥이나 처먹어. ” “ 안 먹어. ” “ 그럼 말던가. ”
어지럽게 늘어진 전선을 돌돌 감던 시라부는 느릿하게 대꾸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몰라? 정말? 후타쿠치는 꾹 삼키며 따라 일어나 먼저 부엌으로 나갔다. 잠시 머물렀을 뿐인데 뺨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저절로 짜증이 섞여 올라왔다. 그는 뒤적이던 냉장고 문을 부러 세게 닫았다. 그래서 그게 부서져? 거실에서 들려오는 비아냥대던 목소리도 오늘따라 달갑지 않다. 그는 축 늘어진 귀가 서둘러 들어가도록 손바닥에 힘을 줘 마구 문질렀다. 짜증 나, 짜증 나, 짜증 나.
애매하게 시작되었던 냉전 상태는 저녁 시간이 넘어서도 도통 풀릴 줄 몰랐다. 어느덧 주말의 반이 지나가는 느낌에 시라부는 읽던 책을 갈무리하며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저녁은 또 뭘 먹어야 할지. 생각보다 오랜만인 것 같은 고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통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사실 아직도 속이 영 좋지 않아서 뭘 먹기도 부담스러운 참이긴 했다. 시라부는 저녁준비 내내 분주한 손길로 사이트 하나를 계속 새로 고치기를 반복했다. 달리지 않는 당첨 댓글과 초조한 시간에 한숨을 몰아쉬었다. 오늘도 안 나오면 정말 어이가 없는 거지. 내가 이걸 몇 년을 들었는데! 그는 이미 닳아버린 손톱 끝을 연신 물어뜯었다.
영 시원찮은 젓가락질 후 시라부는 핸드폰을 들여다본 채 누군가와 연락을 계속했다. 사연은 당첨 안 됐어? 설마 그렇다고 아직 반지도 안 건네준 거야? 자신을 훤히 꿰뚫는 듯한 질문에 시라부는 손을 툭 멈췄다. 내가 안 주고 싶어서 안 준 게 아니잖아. 그는 입술을 비죽이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 그거 산다고 며칠 동안 달달 볶았잖아. ] “ … 그랬지. 근데 집안 꼴이 그런데 어떻게 줘 그걸. ” [ 알고 있는 거 아냐? 테루시마가 반지 사이즈 잰다고 엄청 귀찮게 굴었을 텐데. ] “ 절대로 몰라. 걔는 그냥 내가 일찍 온다는 약속 못 지켜서 그런 거야. ” [ 화해라도 해. 애초에 명왕성 인기 많아서 웬만한 거로는 당첨 잘 안 되잖아. ] “ 그래도…! ”
먼지로 검게 물들어 굳어버린 눈 바닥을 녹이는 이른 봄비와 다 젖은 종이 상자. 녹록하게 힘없이 툭 떨어진 ‘키워주세요’ 가 삐뚤어지게 쓰여 있는 종이와 덮을 것 하나 없이 벌벌 떨던 낙엽 색 무언가. 엄마, 우리 이 강아지 키우면 안 돼요? 우습게도 그건 하나뿐인 연인과의 첫 만남이었다.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낑낑거리는 강아지를 돌보는 동안, 시라부는 새카맣게 물든 티셔츠를 갈아입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밤새 이불자락 하나에 가시지 않은 추위를 버텼다. 기운을 차린 강아지가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할 때 즈음 밤새 썼던 사연이 덜컥 당첨됐다. 아픈 강아지가 빨리 나을 수 있도록 명왕성에 소원을 빌어주세요. 당장 명왕성에 소원을 빌었던 다음 날에,
주인, 안녕. 너, 너, 너, 누구야?! 나 개 아니야, 늑대야.
안녕하세요. 오늘 애인과 만난 지 20년째 되는 날인데, 부디 프러포즈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 * *
카와니시와의 길었던 통화를 끝내고 나서, 시라부는 어제 입었던 코트 주머니 속 깊게 들어있던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진짜 난감하네. 종일 토라져 있는 탓에 말을 걸 틈조차 없었다. 차마 사과할 용기조차 나지 않았던 그는 형광등 빛에 반사되어 눈을 간질이는 반지를 손에 꼈다가, 다시 뺐다, 또다시 껴보기를 반복했다. 그는 표정을 굳히며 열었던 케이스를 다시 접어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이런 식이면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서, 또다시 봄이 오기 전에도 주지 못할 판이었다.
그는 어둑어둑해진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 덮었던 이불을 대충 챙기며 몸을 일으켰다. 들어와서 자라고 해도 영문도 모른 채 계속 뿔이 나 있는 게 도통 말을 듣지 않을 테니까. 먼저 소파에서 잘 심산으로 읽던 책을 이불 위에 얹어 방문을 열었다. 아홉 시 이십구 분, 오후 아홉 시 삼십 분…, 무심코 돌아가는 시곗바늘에 대뜸 시선을 던졌던 시라부는 잔뜩 갈라진 숨소리에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후타쿠치? 테이블과 소파 사이에서 연신 콜록대며 몸을 비트는 게 영 좋아 보이는 상태는 아녔다. 시라부는 인상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감기가 옮았나. 그는 벌겋게 오른 이마에 손을 짚으려 느릿하게 팔을 뻗어 내렸다. 툭 끊어지는 목소리와 눈꺼풀, 시라부는 당황하며 뜨듯한 뺨에 손등을 붙이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달력에 절망했다. 늘 이맘때쯤이었는데, 되지도 않는 프러포즈를 준비한답시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 후타쿠치 숨 쉬고, 숨, 야, 야! ” “ 계속 핸드폰만 보고, 나는, 안 봐, 왜, ” “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담배, 담배라도, 야, 정신 차려, 너 눈 풀린, 야, 야, 잠깐만, 나 월요일에 회샤, 아, 씨발, ”
오전 열한 시 십구 분, 시라부는 일어나자마자 코끝에 닿는 담배 냄새에 질색하며 이불을 걷어찼다. 저 새끼가. 그는 베란다서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연기에 손장난을 치는 또 다른 모양새에 혀를 찼다. 천근만근인 몸을 겨우겨우 무시한 채 발걸음을 옮겨 동그란 뒤통수를 퉁 내리쳤다. 아프다며 소리를 지르는 탓에 귀를 틀어막으며 나긋하게 반문했다. 아프라고 때린 거야. 그는 난간에 끄트머리를 지져 끄며 연신 중얼거렸다.
훅 끼치는 한기에 치를 떨며 곧바로 집 안에 들어온 시라부는 서둘러 노트북 전원을 켰다. 명왕성 라디오, 지난 화, 다시 듣기, 연신 마우스를 움직이던 그는 창 끄트머리에 떠 있는 알림에 의아함을 떨치지 못했다. 시라부는 결국 알림을 확인할 새도 없이 새벽에 진행되었던 라디오를 다시 듣기 시작했다. 십 분, 이십 분이 지나도 제 사연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옷가지를 챙기러 들어왔던 후타쿠치는 제 옆에 앉아서 같이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몽실몽실한 꼬리털을 손에 꼭 쥐던 시라부는 끝내 나오지 않는 사연에 제법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사연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귀를 쫑긋 세웠다.
[ Kenjiro0504님이 보내주셨는데요, 정말 특별한 사연이네요. ] [ 20년 전에 길에서 강아지를 주웠습니다. 비를 맞아서인지 기운이 없어 밤새 간호를 해줬었습니다. ]
… 켄지로? 강아지? 뭐? 연신 시라부의 허리를 조물거리던 후타쿠치는 퍽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좀 닥쳐봐. 시라부는 손을 탁 쳐내며 곧 후타쿠치의 품에 덥석 안겨 기댔다. 명왕성에 소원을 빌었던 날, 강아지는 금세 기운을 차리게 됐습니다. 그를 가만히 끌어안은 채 어깨에 조심스레 턱을 괴던 후타쿠치는 머리칼 사이로 나른히 노니는 손가락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 …그리고 오늘은 애인과 만난 지 20년째 되는 날인데, 부디 프러포즈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 [ 신기하네요. ] [ 그러게요. 20년 동안 변함없는 사랑 감사드립니다. ]
그럼, 프러포즈가 부디 성공할 수 있도록 명왕성에 소원을 빌어주세요.
“ 알고 있었네. ” “ … 난 네가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 “ 키스해 줘. ” “ 싫어, 너 담배 냄새 나잖아. ” “ 진짜 싫다. ” “ 싫으면 각방 쓰던가. ”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시라부는 안겼던 팔을 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옅은 술 냄새가 배 있는 코트에서 반지 케이스를 빼낸 그는 나른히 웃었다. 사랑해. 귓가에 닿는 말이 영 간지러워 시라부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운뎃손가락을 끌어 올리는 동안 뺀 반지가 고스란히 기다란 손가락 위에 담겼다. 후타쿠치는 늘어지게 잔 탓에 부푼 뺨 위에 연신 입술을 찍었다. 한 번, 두 번, 열두 번, 스무 번. 한참 뒤에야 시라부는 몽글몽글한 마음을 꾹 눌러 접어 키스했다.
“ 연애 하자. ” “ … 이미 하는 중인 거 아니었어? ” “ 응, 아녔는데. ” “ 우리 섹스도 하는데? ” “ 닥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