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와니시 타이치가 붓을 내려놓았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이제 그는 취미로라도 절대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운 이름에 여태껏 묻어두었던 생각이 썰물처럼 떠 내려와 종일 그 생각에 골몰하느라 하루가 다 지나버렸다. 어느덧 해가 지는데 아직도 나는 그를 헤맨다. 아직 늦가을이건만 벌써 겨울이 온 것처럼 코끝이 알싸하다. 타이치가 즐겨 쓰던 어딘가 시린 냄새가 나는 채도 낮은 색채가 떠오른 까닭이다. 또 식사를 남겼느냐며 잔소리를 퍼붓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여상하기 그지없다. 넘어가질 않는데 제가 뭘 어쩌겠느냐구요. 조금 반항적인 어투로 답 같지도 않은 답을 한다. 스스로가 다루기 힘들고 귀찮은 환자임을 잘 안다. 그러나 정말로 나는 밥알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과정이 끔찍하고 두렵다. 입안 가득 매연을 들이부은 것처럼 텁텁하고 매캐하여 물도 제대로 삼키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소리 내어 자세히 설명하기조차 버거울 만큼. 간호사는 한숨을 쉬며 얼마 먹지 못해 왔을 때와 별반 다름이 없는 밥그릇들을 트레이에 올렸다. 타이치의 소식을 들은 지 오 일. 식사를 하지 못하게 된 것도 오늘로 딱 오 일째였다.
타이치는 운동을 하는 남자아이치고는 손재주가 제법 좋았다. 그걸 처음 깨달은 것은 1학년, 미술 수업에서였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의 얼굴을 서로 그려보라는 게 수업의 내용이었고, 불행히도 타이치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나였다. 서른이 넘는 학생 중에 하필이면 내가. 그 사소하고도 기쁜, 그래서 더 애달픈 비극에 잠시 눈가가 찌푸려진다. ‘너를 본 적 있어. 작년, 키타이치와의 시합.’ 뒤늦게 또래 남자아이 중에서도 유달리 큰 키가 눈에 들어왔다. 후에 타이치라는 사람이 나를 이토록 괴롭게 만들 줄 알지 못하고, 나는 감히 그가 던지듯 건넨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배구 좋아해?’ 빤히 그의 밝은 눈을 바라보며 묻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전부였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서로를 곧 체육관에서 만나리라고 직감했다. 입을 열지 않은 채 다만 붓을 들었다. 나는 그림에 소질이 없어 몇 번 선을 대충 끼적이다 말았다. 그러나 타이치는 달랐다. 유려한 붓놀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었다. 매끄러운 붓의 새까만 몸체, 그것을 가두듯이 움켜쥔 길고 곧은 손가락, 손목을 기울일 때마다 얼핏얼핏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음울한 그림자. 나는 사랑하는 이의 흔적을 기억 속에서 면밀히 더듬는다. 눈에 비치는 광경은 새하얀 병원 바닥뿐인데 그보다도 가슴 속에 그려지는 타이치의 얼굴이 더욱 선명해 서러워지고 만다. 그날 나는 보아선 안 될 것과 마주한 것이다. 오롯이 나만을 담는 타이치의 눈동자를, 오롯이 우리 두 사람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은 황홀한 시름을. 타이치는 그날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다. 조금, 아주 조금 남았는데 그 조금을 채울 시간이 모자랐다. ‘나중에 완성하면 줄게.’ 그러나 나는 영영 완성작을 받아볼 수 없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내가 타이치를 알기 전부터 우리에게는 시간이 모자랐다. 같은 반, 옆자리, 같은 기숙사 방, 같은 배구부, 사람들은 징하다 말하는 우연이 우리는 마냥 좋았다. 교집합에 원소가 하나하나 늘어갈 때마다 걷잡을 수 없이 진득하게 애정이 포개어졌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어느덧 우리는 서로의 호흡에 익숙해졌고, 그는 내 앞에서 자주 그림을 그렸다. 그런 타이치를 관찰하는 것이 나는 좋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를…….
불행은 거짓말처럼 일상적으로 다가온다. 누군가가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은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창밖은 아직 심해처럼 어둡다.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흐르는 감각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땀을 닦고 한참 숨을 가다듬은 뒤에야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나는 또 타이치의 꿈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악몽을 꾼 것이다. 미지근한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손등으로 훔쳐내었다. 이 불쾌한 감각이 이미 나는 익숙하다. 막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 일상적인 두통에 얼굴을 찌푸리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시야가 어지럽고 눈앞이 시뻘겋게 물든다. 물을 마시는 법도 잊은 채 주저앉다가 그만 들고 있던 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유리가 처참하게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더듬더듬 바닥에 떨어진 잔해를 모으다가 손가락에서 피가 났다. 우습게도 타이치가 이걸 보면 잔소리하겠네, 하는 싱거운 생각이나 들었다. 잠시 후 두통이 개었다. 이 주 뒤에 나는 병원에 다녀왔다. 상습적인 두통이 요즘 들어 더 심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두통약 몇 개나 진단받고 끝날 거라 여겼다. 그러나 불행은 이미 일상 속에 녹아 있었다. 나는 뇌파를 진단받고, MRI를 찍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거창한 경과를 거치며 조금씩 공포심이 치밀었다. 기계음과 약 냄새와 고요한 두려움 속에 갇혀 오랜 시간 결과를 기다려야만 했다. 차라리 결과가 영영 나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은 무정히도 흐르고, 나의 일상은 거짓말처럼 뒤집히고 말았다. 그날 밤 나는 딱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 학교를, 그리고 배구를 그만두어야 했다. 가뜩이나 포기해야 할 것투성이인데 개중에서도 타이치에 대한 미련이 가장 깊었다. 교복을 정리하고, 입원 수속을 밟고, 집을 떠나기 전 문득 타이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단 결과가 나오기 전처럼, 나는 다시 한 번 신호 연결음이 영영 끊기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타이치는 나를 오래 기다리도록 둔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머지않아 통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야? 주말 아침부터.’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컥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잠이 덜 깨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가 지금 어떤 얼굴, 어떤 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훤히 보였다. 나의 병을 안다면 자기 일처럼 아파할 것 또한. 내가 그를 잘 아는 만큼 그도 나를 잘 알았기에, 고개를 쳐들고 애써 설움을 밀어 넣었다. ‘그냥. 보고 싶네.’ ‘답지 않게. 보고 싶으면 보면 되지. 어디야?’ ‘……아냐. 너무 이르잖아, 지금은.’ 사실은 늦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너무 늦었다고.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를 알기도 전부터, 우리에게는 시간이 모자랐다고. 오늘은 날이 좀 쌀쌀하네. 초겨울이니 당연한 일인가. 나갈 일 있으면 따뜻하게 입고 감기 조심해. 그래, 그럼 이만 끊을게. 다음에 보자. 타이치의 인사말에 나는 그래, 하고 대답했다. 마냥 평온한 내 목소리가 끔찍하게 미워지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있잖아.’ 통화 종료를 누르려다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작별 인사까지 나눈 직후라 머쓱할 만도 한데 그보다 묻고 싶은 말이 더 중요했다. ‘만일 네가 당장 내일 죽는다면 무엇을 할래.’ 질문은 생각보다 건조하게 던져졌다. 나는 정말로 문득 생각난 물음을 던지는 사람처럼 담담히 말했다. 글쎄, 나는…… 타이치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거야.’ 지나치게 일상적이고 잔잔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차분하고 고요한 애정이 어젯밤보다도 아파 문득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어찌할 바 몰라 숨만 죽이다가, 인사조차 않고 말없이 통화를 끊어버렸다. 다음날부터 나는 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아예 핸드폰 계약조차 해지했다. 그에게 더없이 잔인한 짓을 했는데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서는 병원에 틀어박혀 산책조차 하지 않고 멍하니 창밖만 내다보기 일쑤였다. 요양 병원에 계신 노인분들도 이렇게 무기력하지는 않을 거라며 보는 사람마다 잔소리를 했다. 보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간호사 A, 간호사 B, 그리고 간호사 C. 이 정도가 끝이라는 점이 또 슬펐다. 타이치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을 때는 공책 한 장을 찢어 그림을 그렸다. 그가 했던 것처럼 섬세한 표현을 하려 애써 보지만 어림도 없었다. 매일 고질적인 구토와 두통에 시달리는 내게 그처럼 아름다운 세계를 바라보고 화폭에 담아내는 일은 평생 불가능할 것이다. 내 그림의 주제는 언제나 동일했다. 카와니시 타이치, 그것 하나가 전부다. 하지만 정말이지 나는 지독하게 그림에 재능이 없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터이므로 다 그리고 나면 창을 열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그래도 사람을 그린 종이를 구기거나 찢어서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이 타이치라면 더더욱. 그러나 그 짓도 팔 개월 정도 지난 후부터는 관두었다. 그래야만 했다. 타이치를 떠올릴 때마다 남는 건 죄책감과 후회뿐인데 돌이켜 보니 거의 매일매일 그를 그리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초라한 죄악감조차 덮고 나니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여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만으로 계절을 헤아린 지도 벌써 이 년이 다 되어간다. 늦가을의 공기가 조금 쌀쌀해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겼다. 방금 막 일어난 참인데 거짓말처럼 졸음이 다시 몰려왔다. 조금 더, 아주 조금만 더 깊고 오랜 꿈을 꾸고 싶었다.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다가 천장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은 어지러움과 함께 눈을 감았다. 켄지로. 저 멀리서 타이치의 목소리가 들린다. 눈을 감으며 막연히 예감한다. 비로소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