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기념일이란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아닌 날. 응답이 기록되었습니다. 시라부는 계단참에서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저만치 떨어진 길가에 새까만 벤틀리 한 대가 시동을 켠 채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라부는 그게 누구 차인지, 또 기다리는 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운전석은 실내등만 켜진 채 비어 있었다. 지금쯤 모스크바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중이어야 할 인간이 왜 이 머나먼 남쪽에 그것도 선약도 없이 내려와 있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실상은,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시라부는 흘끗 내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때마침 늙은 수위가 안쪽에서 문을 잠그고 어정어정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방향을 잘못 잡은 척 하고 도로 기어들어가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어쩌면 이미 보았을지도 모른다. 어째 안 오나 싶은 마음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건 픽업에는 기가 막힌 위치 선정인 셈이었다. 하는 수 없이 시라부는 얼굴에 철판을 좀 깔기로 했다. 체신머리 멀쩡한 사람으로서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네가 그러고도 스물일곱 먹은 어른이냐, 같은 양심의 비명이 가슴 속을 쿵쿵 울렸으나 무시하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보안 이슈 때문에 연구동에서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은 단 한 갈래뿐이었고, 시라부의 혼다 어코드는 지금 안전한 사내 주차장이 아니라 수리 센터에 맡겨져 생명이 걸린 대수술을 받고 있었으므로. 시라부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서 어깨에 대충 걸쳐 있던 백팩을 단단히 고쳐 맨 다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젖은 땅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스프린터 자세를 잡았다. 이래봬도 소년 시절에는 육상 유망주로 이름깨나 날렸던 몸이었다. 오랜 책상물림 생활에 길들여진 지금에 와서도 시라부는 여전히 어지간한 현역 선수들보다 몸이 가볍고 발이 빨랐다. 좋아. 망할 벤틀리 지나 교차로까지 오십 미터. 교차로에서 정류장까지…… 설마 내빼는 사람 뒤를 차 끌고 쫓아오진 않겠지. 시라부는 무심코 길 건너편 사선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자세를 낮추고 보면 검은 차체는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검둥개처럼 보였다. 셋에 뛰는 거야. 시라부가 다시 가야 할 방향을 보고 거꾸로 셋을 다 세었을 때, 검둥개가 눈을 깜빡였다. 위협적인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삑뾱 소리와 함께. 시라부?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씨발. 시라부는 잇새로 욕설을 삼켰다. 존재하지 않는 주님, 왜 하필 오늘인가요. 하필…… 시라부는 반쯤 도축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무릎을 펴고 일어서서 천천히 몸을 틀었다. 딱 한 발짝 나가면 닿을 거리에서 우시지마가 가만히 시라부를 내려다보았다. 어디서 오는 길인지 손에 검은 편의점 비닐봉투 한 개를 들고 있었다. 송치 가죽장갑에 싸구려 비닐 재질의 부조화가 기묘하게 눈에 설었다. 듣기로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변명하듯 말했다. 시라부는 그의 표현을 정정해 주고 싶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못 먹은 게 아니라 안 먹은 거겠다. 중요한 보고서 마감 건으로 하루 종일 신경이 곤두서서 도무지 입에 뭘 집어넣을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점을 지적하면 우시지마는 필시 그러나 저러나 굶은 건 똑같잖아, 라고 대답할 것이다. 시라부는 반사적으로 시계 문자판에 눈길을 주었다. 오 월 사 일. 시라부의 생일 겸 결혼 일 주년 기념일이었다. 혼슈 최남단 섬의 봄밤은 춥지도 않고 하루 종일 몰아부치던 바람도 비도 긋고, 행색마저 초라함과는 거리가 먼데 어쩐지 우시지마는 몹시 처량맞아 보였다. 주인 잃어버린 견공 같다고 해야 할까. 시라부는 한숨을 한 번 쉬고 그에게서 봉투를 받아 들었다. 안쪽에서 얇고 가벼운 플라스틱 껍데기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났다. 안아 봐도 되겠어? 안 될 거 뭐 있어요. 우시지마는 꼭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다른 인간을 만져 보는 인간처럼 조심스레, 천천히 시라부를 끌어안았다. 생일 축하해. 시라부는 팔을 뻗어 우시지마를 마주 안았다. 보고 싶었어. 저도요. 흉곽 안쪽에서 플라스틱 심장들끼리 달각달각, 달각달각, 바람에 불려 자꾸 부대꼈다.
야간주행 산호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우수한 센티넬이었다. 일각에서는 최초 발견 이후 사십오 년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인재라고도 했다. 그가 처음으로 능력을 발현한 때는 전선에서 날마다 인간이 죽어 나가고, 급기야 패배의 가능성마저 점쳐지던 시기였다. 이제 겨우 미성년을 벗어난 소년, 그것도 유명 무기상의 외아들이 자원입대를 결정했다는 소식은 음울한 분위기 속 일말의 희망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슬프지도 안타깝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애가 명예롭게 죽는다면 그것이 저의 다시없는 기쁨이겠지요.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류의 존속이 위험에 처한 이 시기, 사회지도층으로서 모범을 보일 수 있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일 열린 짧은 기자회견에서 우시지마 유코는 그렇게 심경을 피력했다. 그 뒤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책임자들 전원의 예상대로였다. 우시지마를 시작으로 전쟁의 모든 기록들이 깨져 나갔다. 첫 해에는 남쪽의 스물두 개 거점을 탈환했고, 그 다음 해와 다다음 해에는 우시지마에 필적하는 급의 신생 센티넬 네 명을 더 모아 들일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 반격의 시작이었다. 인간은 외계 생명체와의 전쟁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한편 시라부는 전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종류의 인간이었다. 시라부의 고향인 센다이 시 주변에는 군 주둔지도, 그들을 불러들일 만한 이형 생물 군락지도 없었다. 어쨌거나 전쟁의 원흉인 그것들은 관서 위로 올라오지 못한다는 것이 당시의 정설이었다. 시라부는 고등학교 육상부 주장이면서 동대 입시를 준비 중인 평범한 학생이었다. …말인즉, 시라부가 몇 년 후 일련의 편치 않은 과정을 거쳐 우시지마의 소속 집단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우시지마가 시라부에게 관심을 보이게 된 것 역시 과히 상식적인 전개는 아니라는 의미다. 상식적이지 않아도 가능은 한 일이었다. 더불어 시라부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시지마의 전임 가이드로 일하게 된 것도, 끝내 직장 동료 선에서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것도, 자기야와 우시지마 씨 사이에서 선배로 호칭 타협을 보게 된 것도 전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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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기념일이란 무엇입니까? 시라부는 펜을 든 채 잠시 망설였다. 도호쿠에서 오카야마로 거주지를 옮긴 다음부터는 사생활을 깎아 업무 할당량을 채우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판국에 기념일 따위가 의미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었다. 금방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유치한 질문이었다. 시라부는 길지 않은 고민 끝에 야치 히토카 그리고 하이바 리에프 심리 검사표에 이런 거 집어넣지 마라, 라고 간단히 한 줄을 적어 넣었다. 아직 전쟁을 모르는 새파란 새끼 엔지니어들은 언제나 쓸데없는 데 관심이 많았다. 예년처럼 워드 작업에 동원된 꼬맹이들이 지나치게 넓은 공란을 활용하여 아무 말이나 집어넣은 티가 역력했다. 시라부는 가로로 세 번 접은 에이포 용지를 서랍 안에 대강 밀어 넣었다. 걷으러 오면 주고 아니면 적당히 그냥 버릴 요량이었다. 발로 바닥을 밀어 의자를 뒤로 물리자 소리도 없이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왜 왔어요?
모의 훈련장은 상황실에서 한참 멀었다. 시라부가 묻자 그는 별 말 없이 감색 보자기로 싼 꾸러미를 책상 끄트머리에 올려놓았다. 시간 괜찮으면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해서. 우시지마가 직접 만들었다는 도시락 반찬은 시라부의 예상보다 훨씬 괜찮았다. 시라부는 한담 중에 별 의도 없이 설문지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더라고요. 어린애들 웃기지 않아요? 그게 우스운가? 우시지마가 정색하고 물었다. 소모적인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라부도 정색하고 대답했다. 당장 내일 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국에 그런 식의 기분 전환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예요. 그렇다고 포기해 버리면 우리에겐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아. 네 말처럼 고작 이십사 시간 앞도 내다볼 수 없으니까, 더더욱 뭐라도 붙잡을 게 있어야만 하는 거다.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그 날의 우시지마는 드물게도 말이 길었다. 마지막. 내일. 시라부는 같은 문항이 든 질문지가 작년에도 돌았던 것을 문득 기억해 냈다. 그 때 옆자리를 썼던 동료는 우시지마처럼 센티넬이었는데, 펜을 들어 딸의 생일이라고 적어 넣는 걸 옆에서 구경했었다. 콧잔등의 주근깨가 작은 별무리 같았던 그 여자는 이제 없다. 시가전에 나갔다가, 죽었다. 갑자기 우엉볶음이 쓰게 느껴져서 시라부는 들었던 찬합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더 먹어. 너는 체력을 보강할 필요가 있다. 선배는 뭐라고 썼는데요, 거기다. 우시지마가 잠시 시라부를 빤히 바라보았다. 0504. 그건 내, 시라부가 마저 말을 이으려는 차에 요란하게 경보가 울렸다. 청색 경보. 청색 경보. 센터 내 모든 전투 인원은 지금 즉시…… 먼저 가 봐야겠군. 오카야마는 대-외계 생물 전쟁에 있어서 사실상 혼슈의 최전방이었다. 언제 경보가 떨어져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잠시 소리 나는 방향을 주시하던 우시지마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다녀올게. 어차피 저도 지원 나가니까, 이따 봐요. 그래. 생일 축하해요. * ……매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선배가 나 때문에, 나를 보고 살지 않았으면 해. 내 개인 감정이 아니라 팀 전체의 효율성을 위해서. 흐음. 듣고 있던 켄지가 상체를 조금 더 앞으로 기울였다. 실은 네 말이 맞아.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기념이고 추억이고 죄 빚이지. 그것도 이자율 엄청나게 짠. 켄지가 여섯 살 먹은 여자애처럼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나도 그래. 혹시 나 먼저 가고 나면 우리 착한 자기가 내 생일이며 온갖 날마다 질질 짤까 봐 걱정되거든. 코끝이 매울 만큼 신랄한 농담은 켄지의 장기였다. 네가 그런 걸로 고민을 해? 몰랐네. 능력의 특성상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후타쿠치 켄지 역시 우시지마를 포함한 일본 재해관리국의 탑 파이브 중 하나였다. 모든 작전에서 중추 역할이 되는 일본 각 지부의 센티넬 다섯 명을 기관에서는 그렇게 불렀다. 기본적으로 우시지마는 간사이, 켄지는 시코쿠 담당이었다. 툭하면 남의 담당지역까지 커버해야 하는 만성적인 인력 부족 탓에 크게 의미는 없었지만. 왜 이래. 켄지가 어깨를 으쓱했다. 알잖아. 센티넬이라고 불사신인 건 아냐. 항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 심지어 우리들 센티넬조차도, 다른 인간의 마음에 버팀목이 되어 주기에는 너무 약해. 그렇지만 우시지마에게는 기대를 걸어 봐도 좋다고 생각해. ……어디까지나 사견이지만, 그래. 일본 최고의 센티넬이잖아? 게다가 널 애지중지하는 것 같고. 바로 그 점이 문제라는 건데. 시라부는 이미 알 사람 다 아는 사실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라면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거야. 곧 차량이 멈추고 시동이 꺼졌다. 준비 됐지? 일 하자, 일. 돈 벌어야지. 켄지가 시라부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 앞서 내렸다. 땅바닥에 발을 딛기 무섭게 익숙한 탄내가 훅 끼쳐 들었다. 시라부는 이어 마이크를 꺼내 꽂고 전원을 켰다. 전체 통신 시작. 백업 팀 팀장 시라부 켄지로입니다. 5분 후에 후방 지원 작전 시작하겠습니다. 각자 위치에서 스탠바이. 시라부는 바리케이드 앞으로 걸어가서 랩탑 패드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생체 인식 완료. 보안키 확인 완료. 다중 지원 프로그램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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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로써 그와 우시지마 사이에 첩자가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사고가 좀 나서, 수리 맡겼어요. 다치진 않았고? 네. 당사자 앞에서 그쪽 생각하다 차와 목숨을 함께 박살낼 뻔 했다고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시라부는 뻔뻔스럽지 않았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인간 영토의 대부분을 수복한 지금에 와서도 이형종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를 예측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걸 차로 들이받아서 잡았다고 말하면, 그 때 금 간 늑골이 아직 좀 덜 붙었다고 덧붙이면 그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시라부는 플라스틱 포크를 입에 문 채 흘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우시지마가 어딘가의 편의점에서 사 온 조각 케이크는 그렇게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못 먹을 맛도 아니었다. 고작 생일 축하한다는 말 전하려고 비싼 걸음 하신 건 아닐 텐데요. 그러면 안 되나? 시라부는 포크 끄트머리를 아득 씹었다. 얄따란 플라스틱이 입 안에서 작고 날카로운 조각들로 부서졌다. 농담이야. 재미있네요. 다신 하지 마세요. 도쿄로 돌아와. 너는 여기 머물기에는 아깝다. 아깝고 아깝지 않고는 내가 정해요. 선배가 아니라. 시라부는 쏘아붙여 놓고 고개를 돌렸다. 창 밖에는 남중국해의 해구 같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땅도 없고 바다도 없는, 세상의 첫 번째 날 같은 적막 속에 불빛 몇 점이 간신히 떠 있었다. 무슨 생각 해? 한참 말 없이 운전하다 말고 우시지마가 물었다. 아무 생각 없어요. 창유리에 이마를 박은 채 시라부가 대답했다. 그보다 이 손이나 좀 놓지 그래요. 한 손 운전 위험한 거 모르지도 않는 사람이. 싫어. 놓으면 또 도망갈 거 아닌가. 우시지마는 그렇게 말하며 시라부의 손 위로 깍지를 끼어 잡았다. 아니라곤 말 못하겠네요. 일은 어쩌고 왔어요? 다 정리됐다. 본가에 들러서 내려오느라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우시지마가 출국한 게 지지난 주 월요일이었다. 지지난 주 월요일, 지난 주 월요일…… 어림잡아 날짜를 계산하던 시라부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경악에 찬 시선으로 우시지마를 노려보았다. 제정신이에요?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요. 선배는 목숨이 뭐 두 개라도 돼요?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이야 그렇겠죠. 그러다 어느 날 폭주하기라도 하면. 거기에 나도 더 이상 없을 텐데. 시라부는 아프게 마지막 문장을 내놓았다. 이 주일 걸릴 일을 삼 일만에 해치우는 게 과노동이고 혹사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통제 불가능한 센티넬에게 내려지는 처분은 하나뿐이었다. 그럼에도 많은 센티넬들이 적합성 맞는 가이드를 구하지 못해서, 자기 목을 밧줄 올가미에 걸쳐 놓고 살아간다. 우시지마는 귀중한 재원이고 거대한 조직 내에서도 손에 꼽게 영향력 있는 인사였으나, 그 역시 써먹을 수 없게 된다면 마지막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였다. ……나는 선배가 몸 좀 사려 가면서 일했으면 좋겠어요. 진심을 담아 시라부가 말했다. 그럴 수는 없다. 어차피 나는 괜찮아. 내가 시라부 떼놓고 여기까지 내려온 데도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 안 해봤어요?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아니었나. 이 사람을 어쩌면 좋지. 시라부는 헛웃음을 쳤다. 똑똑히 들어요, 선배. 날카로운 목소리에 우시지마가 갓길로 차를 댔다. 나 아직 선배 많이 좋아해요. 여기 와서도 매일같이 보고 싶었고, 목소리 듣고 싶었어. 그럼 왜. 내가 당신이 앞으로 나가는 데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으니까. 선배가 나보다 우수한 가이드를 만나길 바랐을 뿐입니다. 그깟 기념일이나 사적인 감정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더 현명하고 침착한 가이드를 만났으면 했어. 털고자 했던 속내를 겨우 다 털어놓았음에도 전에 없이 비참한 기분이었다. 우시지마는 잠시 시라부의 옆얼굴을 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다가,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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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프로그램을 종료합니다. 인원 체크 끝났어? 대강 다 되긴 했는데…… 켄지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뭐. 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우시지마가 없어. 애들 먼저 내보내고 남은 모양이던데, 시발 그러면 나한테 먼저 말을 했어야지. 켄지 현장 지휘 할 줄 알지? 시라부는 훌쩍 몸을 날려 바리케이드를 뛰어넘었다. 어디 가? 빌어먹을 낙오자 회수하러. 스톱워치 켜. 만약 내가 그 시계로 십오 분 지나도 무전도 안 받고 나오지도 않으면, 안에서 뒈진 거니까 그냥 건물 째로 터뜨려. 우시지마는? 그는 나올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내가 멋있다고 해 줘야 해? 켄지가 투덜거렸다. 뒷정리 부탁할게. 시라부는 안전지대를 뒤로 하고 걷다가, 뛰다가, 마침내는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라부의 장기적 계획, 혹은 당장의 바람이야 어떻건 그는 지금의 시라부에게 없어선 안 될 사람이었다. 마침내 건물 이 층으로 오른 시라부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복도 끄트머리의 어둠 속에 파랗게 빛나는 불 한 쌍이 떠 있었다. 이형종異形種은 빛을 받아도 눈에서 반사광을 뿜지 않는다. 선배? 발 밑에 이형종의 점액질이 밟혔다. 괜찮습니까? 시라부는 청각과 촉각에만 의존하여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선배, 대답해요. 거기 있어? 여기 있어. 어느 순간 우시지마가 대답했다. 사투의 흔적으로 온통 난장판인 주변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분명한 목소리였다. 시라부는 총을 발치에 내려놓은 다음 무릎을 접어 우시지마와 눈을 맞추고 앉았다. 기이하게 이채가 도는 눈이었다. 시라부가 맥박을 확인하기 위해 우시지마의 목 언저리에 손을 가져간 순간 그가 시라부의 허리를 낚아채 품에 가두었다. 안았다, 라기보다는 잡아챘다, 라고 말하는 편이 적당하게 느껴질 만큼 억센 힘이었다. 선배? 한순간 그가 아주 크고 낯선 생물처럼 느껴졌다. 이건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우시지마가 아니야. 시라부는 그의 눈을 한 번 더 마주친 순간에 생각했다. 깊은 수준의 가이딩은 센티넬뿐만 아니라 공여자인 가이드에게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라부가 느낀 것은 가이딩을 진행할 때마다 늘 겪던 가벼운 두통 수준의 스트레스가 아닌, 명백한 통각이었다. 작열통에 가까운 강도의 끔찍한 고통이 우시지마와 함께 시라부를 찾아 들었다. 시라부는 구역 안의 잔여 생명체들을 유인할지도 모르는 비명을 참기 위해 우시지마의 옷자락을 틀어쥐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오래 감았다 다시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우시지마가 너 안고 엄청 다급하게 튀어나왔어. 타임아웃 삼십 초 전에. 켄지가 말했다. 지 가이드 죽는다고 애 좀 살려달라고. 덕분에 너도 살고 그쪽도 살았지. 그랬냐. 진짜 기억 안 나나 보네. 아무튼 몸에 큰 이상은 없고 과로한 것뿐이라니까, 눈 감고 좀 쉬어. 시라부는 얌전히 시키는 대로 따랐다. 종전과 같은 통증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몸이 삼 년 동안 달릴 거리를 하루에 다 뛴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게 무거웠다. 몸의 과부하는 폭주를 그대로 떠안은 데 대한 대가일 것이다. 면회는 내일쯤 가능할 거래. 나 간다. 저기, 선배는 괜찮아? 그 놈의 선배 정말…… 켄지가 한숨을 쉬었다. 잔기스 하나 없이 멀쩡해. 멀쩡한 것이 아니라 ‘멀쩡해진’ 것일 테다. 기관 최고의 재원답게 탑 파이브 급들은 사지육신 중 하나 잃어버리는 정도의 손실로는 웬만해서 죽지 않았다. 켄지는 논외였다. 아까도 너 보러 오겠다고 고집부리는 거 붙잡아 두느라 고생 좀 했어. 그 사람은 아마 좀 있으면 올 거야. 급수는 비슷하지만 내가 어떻게 막아볼 수 있는 인사가 아니라서. 켄지의 얼굴에 익숙한 환멸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멘트 칠 거 있으면 미리 준비해 두고, 병실에서 물리력 쓰지 마. 날 선 경고를 끝으로 켄지는 방을 떠나갔다. 나는 선배 앞의 길을 열기 위해 존재해요. 시라부는 우시지마에게 말했다. 선배는 내가 열어준 길을 자신의 힘으로 따라가면 되는 거고. 그게 전부 아닌가요, 우리 관계라는 거. 우리는 운명의 짝 같은 게 아닙니다. 필요에 의해 만나고 필요가 다해서 헤어지는 관계라면 모를까. 나는 선배한테 나를 이용하지 말라고 한 적 없어요. 오히려 이렇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시지마는 한참 말이 없었다. 시라부. 인내심이 삼 분의 일쯤 깎여 나갈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가 입을 뗐다. 듣고 있어요. 결혼할까. 선배 생각보다 되게 구식이네요. 시라부는 평정을 가장하여 대답했다. 저는 이 이상 사사로운 기념일 같은 거, 기억할 만한 거, 늘리고 싶지 않은데요. 나는 그러고 싶어. 시라부는 그 때 단 한번, 우시지마에게 져 주었다. 공교롭게도 그 뒤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재해의 싹은 위도와 경도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전투인원들은 운남에서, 포항에서, 나가사키에서, 가고시마에서 끊임없이 죽고 또 어디선가 그만큼 다시 만들어졌다. 그들 중 누구도 우시지마보다 강하지 못했다. 이름이 무색하게도 ‘재해’에 대한 ‘관리’는 계속해서 실패로 돌아갔다. …필시 그러리라는 게 중론처럼 되어 있었을 때 시라부는 기어이 승기를 끌어냈다. 이전처럼 극심한 고통을 동반하는 두 번째 폭주를 제어한 지 삼 개월 만에 그는 자원해서 낙도의 손바닥만한 연구소로 자발적 전출을 신청해 갔다. 삼 개월 동안 어떤 참담한 일들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들은 시라부를 애써 붙잡지 않았다. 파멸적 양상을 보이며 치닫던 전쟁을 간산히 소강기로 돌려 놓은 데는 불사신과 같은 센티넬을 이 악물고 거의 한계까지 굴려 먹은 시라부의 공이 컸다. 그러나 시라부 당사자에게 스스로의 공로는 능력의 증거가 아니라 무능의 지표였다. 시라부는 연구소로 내려와서도 하루 걸러 한 번 꼴로 우시지마가 나오는 악몽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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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써서 이겨 보이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시라부의 집 앞에 얌전히 차를 댄 우시지마가 타이르듯 말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저 말고도 본청에 인재는 많을 거예요. 아니, 너뿐이다. 그러니까 씨발 나는 선배 그런 점이 싫다는 거라고…… 시라부는 헤드레스트에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처박았다. 알고 있었다. 다섯 명 중 유일하게 우시지마의 가이드 역할을 할 만한 인물은 우시지마의 이름 첫 글자만 나와도 저주를 퍼부었고, 나머지는 다 거기서 거기였다. 센티넬이면서 동시에 가이드 역할도 평균 이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재능은 우시지마가 오늘 당장 시라부를 포기할 확률보다 더 희소했다. 그러니까 결국 또 시라부, 오로지 시라부 켄지로뿐인 거였다. 선배는 내 기분 모르죠. 매번 현장 나가서 당신 죽고 살고 하는 거 볼 때마다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아마 나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야. 차라리 당신이 욕을 하고 화를 냈으면 좋겠어. 따라오지 않으면 머리채를 잡아서 끌고 가겠다고 협박이라도 해 봐. 그럴 수 없다. 내가 어떻게 시라부 너에게 그러겠어. 당장 가이드 필요하잖아요. 선배 착한 사람 아니잖아. 시라부는 악에 차서 내뱉었다. 왜 나한테만 이렇게 존나 물러요? 스스로 형편없는 변명이라고 자조하면서도 한 번 터진 둑을 멈출 수는 없었다. 팀장으로서 시라부는 현장 상황과 연결된 모든 자료를 보고 외우고 기억할 책무가 있었다. 오카야마에 있을 때 시라부는 누구보다도 더 많이 우시지마의 참혹을 목격하고 방조하고, 나아가 그 모든 참혹 자체를 시작에서부터 주관한 사람이었다. 내가 한 끗만 잘못 나가도 선배를 영원히 죽게 만들지 모른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좋아하면서 좋아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게 얼마나 진 빠지는 일인지 아냔 말예요. 안 죽을게. 죽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을게. 우시지마가 단단한 손바닥을 펴 시라부의 볼을 감쌌다. 약속이다. 그러니까 울지 마. 선배가 약속할 수 있는 게 아닌 건 알죠? 적어도 나한테는, 네 잘못 같은 건 없어. 시라부는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오래 살자. 둘이 함께 틀딱 될 때까지 살아서, 매 해마다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자. 기념일이 일 년에서 하루씩 빠지는 날이 되지 않게 하자. 행복하자. 당신이 그러니까 굉장히……덜 미친 소리처럼 들리네요. 진심이야. 틀딱이라는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요? 텐도가. 아 그 인간 진짜…… * 내일도 여기 있을 계획이에요? 당분간은. 일 주일도, 이 주일도 아니고 당분간이라니. 아주 포대기에 싸서 업어가려고 작정을 하고 나온 게 뻔히 보였다. 스케줄 없으면 내일 아침이나 같이 먹죠. 시라부는 되는 대로 던졌다. 한순간 우시지마의 기복 드문 얼굴에 티나게 화색이 도는 걸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홉 시 괜찮아요? 괜찮아. 데리러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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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부 우시지마 선배 만났어? 오전 01:23
너였냐 이 산업 스파이 새끼야 오전 01:30
응 도쿄 가면 말 잘 해서 나도 꼭 좀 불러 올려 주고 오전 01:32
지랄하네 진짜 야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처자 오전 01:55
선배한테 잘하고 오전 01:59
네 알 바 아니고. 보고서 첨삭 맡긴 거 어떻게 됐냐 오전 02:02
잘 자 오전 02:05
야 오전 2:06 야 오전 2:06 씨발 야 카와니시 타이치 오전 2:06 너 내일 만나기만 해봐 머리털을 다 뽑아 버릴 줄 알아라 오전 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