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침 떼기


댄타
‌@eosck_dt


 

 모두가 사람과 사랑의 차이는 받침 하나 차이라고 들 말한다. 사람의 ‘ㅁ’은 인간관계처럼 날카롭다며, 사랑의 ‘ㅇ’은 그 자체로도 부드럽고 달콤하다고. 그에 비해 그 시절 우리는 저 받침 떼기 사이의 글자도 관계도 아니었다. 그저 그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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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그저 난 생일을 빌미로 너에게 한마디 꺼냈을 뿐이었다. 종소리 마냥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 때문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종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내 목소리는 좋아한다는 한마디였고 그 말을 끝으로 내내 곁에 머물던 종소리도 서서히 저물어갔다. 종소리가 저물자 귀에는 어지러울 만큼 온갖 소리가 딩딩 크게 울려왔다. 마치 그 순간만큼은 어렸을 적 자주 보던 만화책의 주인공이 된 줄 알았다. 만화책의 주인공은 소리에 예민했다. 작은 소리에도 소리가 고막을 친다며 귀를 아파했고 심지어 사람의 속마음까지 들려왔다. 난 그 시간 속에서 홀로 속마음이 들리지 않는 만화책의 주인공이었다. 한참을 만화책을 생각하고 있다가 날 불러오는 네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한심했다. 고백한 마당에 만화책이나 생각하고 있고. 이럴 땐 만화책과 달리 내 생각을 읽지 못하는 시라부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하고 답해줘도 늦지 않지? 멋쩍은 듯이 웃으면서 말하는 너에게 감히 지금 대답해달라고 쌩 떼를 피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거기서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끄덕이고 집에 데려다 주는 그 따위 것뿐이었다. 흔들리는 네 손을 잡을 수 없는 내가 미웠고 끝까지 아무 말도 않던 네가 야속했던 날이었다. 최악의 생일이었다.

 그 날 집에 와서 따뜻한 물에 씻어도 잠에 들지 못했다. ‘고백을 했는데 생각해보고 대답 해준데요’ 이 따위 질문들을 지식 창에 검색해 1페이지부터 12페이지까지의 질문들의 답변들을 확인해보기까지 했다. 몇 페이지의 몇 번째 질문인지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그 질문의 답변이 내 밤잠을 설친 이유의 한 몫을 한다는 것은 당당하게 말 할 순 있었다. ‘시간을 달란 말은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거 아닌가요? 싫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끝냈을 거예요. 희망을 가지세요. 질문자님. 꼭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희망을 가져라, 희망이 있다. 이 따위 희망이 뭐라고 난 또 어리석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희망을 가지면 돼. 곧 답해주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 땐 알았을까 어리석던 10대를 지나서 반 오십을 찍을 때까지 대답을 못 듣고 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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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오십이 된 나와 아이는 아직도 그 날의 기억을 안주 거리로 삼으며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난 어른이 됐어도 배구 할 줄 알았어, 우리 그 때 웃겼는데 그치? 그 때 부실에서, 내 생일 때 내가 너한테. 이렇게 안주 거리로 삼을 만한 그날은 그날의 난 어리석었고 너는 어리석던 나에게 야속했던 추억일 뿐이었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오늘 밥 먹었어? 와 같은 뉘앙스로 말 주머니를 여는 말이 필요 했을 뿐이었고 나는 그때의 우리를 꺼냈을 뿐이었다. 너 내 생일 때 기억나? 아마 내 기억 속 네 표정은 ‘이 새끼 또 이 얘기네’ 지겹다는 표정이었다. 나 근데 아직 켄지로 네 대답 못 들었는데. 그 말과 함께 멸치 따위를 주워 먹던 네 손에서는 멸치가 툭 하면서 떨어졌고 배구도 아니고 무슨 야구냐고 하던 네가 꾸준히 챙겨보던 라이브 야구 경기가 나오는 티비를 쳐다보던 네 눈은 크게 뜨여진 체 날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큰 눈이 내 눈과 마주치는 순간 나는 또 한 번 어렸을 적의 나같이 만화책 주인공이 돼있었다. 만화책 주인공 마냥 심장 소리가 종소리처럼 울려왔다. 쿵쿵 호프집에서 들려오는 무슨 노래인지도 모를 레코드 음반소리와 꽤 잘 어울렸다. 또 다른 만화책의 주인공이라도 됐는지 소리가 아닌 것들의 따위에 예민해져왔다. 귀가 뜨거워졌고 속에서부터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열이 자극적이게 느껴졌다. 호프집이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심하게 만화책이나 생각한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그 날도 시라부 켄지로가 만화책의 주인공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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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은 평소보다 늦게까지 마셔댔었던 것 같다. 나보다 술이 약한 너를 달빛에 의지해 집에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부축해준다는 변명으로 맞잡은 손은 한참을 기다렸다 잡은 대가만큼 화려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렇게까지 해서 잡은 내가 한심했을 뿐이었다. 거기다 단단하게 맞잡아주는 네가 미웠다. 그 순간만큼은 내 속도 몰라주는 만화책의 주인공이 아닌 네가 미웠다.

 “타이치 잠시만” 너의 집 앞에 다 왔을 때 들려오는 한 발짝 뒤에서 조금은 꼬인 듯한 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걸음 더 가서 멈춰 선 뒤 돌아본 네 얼굴은 붉었다. 날 불러 세운 거리의 가로등이 환해서 다행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어떻게 귀엽다고 말해줘야 할 까 고민 할 정도였으니깐. 귀도 막은 체 꽤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막힌 귀를 뚫고 내 이름이 들려왔다. 타이치. 흠칫 놀라며 너와 눈을 마주쳤다. 하얀 얼굴과 달리 볼과 귀, 목이 아직도 빨갰다. 생각해보고 답 해준다 했던 거 아직도 유효한 거지? 어눌한 발음으로 말 해오는 너에게 난 또 다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있잖아 나, 오물거리는 입이 야속했다. 속마음을 읽지 못 하는 내가 미웠다. 내가 만화책 주인공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루에도 난 너 때문에 만화책 주인공을 여러 번 오간다.

 좋아해. 네가 뱉은 한마디에 만화책을 보던 순간부터 그 날의 추억들, 오늘 날까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나에게 희망을 주던 그 지식 창의 답변자를 끌어안고 어화둥둥 지구 한 바퀴를 돌고 싶은 마음이었다. 오늘 밤은 그 답변을 찾느라 날밤을 샐 것 같다. 오늘은 그 날과 비슷하다. 다만 너와 맞잡은 손이 따뜻하다는 게 그 날과 다를 뿐이지. 카와니시 타이치는 18살 생일 선물을 시간을 넘어 받았다. 오늘은 카와니시 타이치에게 최고의 생일이다.

 우리의 받침 떼기는 더 이상 ‘ㅁ’과 ‘ㅇ’의 글자도 관계도 아닌 것들의 사이에 있지 않는다. 우리의 받침은 틀에서 벗어나 자리를 찾아 여정을 떠났고 아직도 어디에 있는지 멈춰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우리의 받침은 그렇다. 오늘 밤 지식 창에 ‘ㅁ’과 ‘ㅇ’의 사이에 무엇이 있나요? 라고 물어오는 질문이 올라온다면 그것은 감정에 젖은 내가 올린 질문이지 않을까. 우리 사이는 감정에 젖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저 정말 감정에 젖은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