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산호
@4S_Backup





어떤 사람의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본 일이 있었다. 인간은 신과 닮게 만들어진 존재로, 그 눈 속에는 우주의 뭇 별과 생사고락의 안과가 함께한다.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조금이나마 긍정하게 되었던 때가 있었다.

야. 시라부 켄지로는 발끝으로 코트 바닥에 뻐드러져 누운 고시키의 다리를 톡 걷어찼다. 툭, 도 아니고 톡.
안 일어나? 이게 후배 생기더니 빠져가지고.
잠깐, 잠깐만요! 고시키가 얼굴에 덮은 수건은 걷어치우지도 않은 채 우렁차게 항변했다.
아직 백 번은 더 뛸 수 있슴다!
아니, 일어나서 정리하고 들어가라고. 연습량 초과야.
고시키는 그제서야 벌떡 일어났다. 아무렇게나 핀을 찔러 고정했던 앞머리가 제멋대로 흩어진 데다 땀에 절어 떡이 돼서, 빈말로라도 예쁘다곤 못 할 면상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 세 시간 내내 죽자고 토스만 올려 댄 시라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였다. 자꾸 드러누우려는 걸 붙잡아 청소에 소등까지 마치고 겨우 체육관을 빠져나왔을 때는 열 시가 넘어 있었다. 시라부와 고시키는 각기 입에 소다 맛 하드를 한 개씩 물고 체육관 앞길을 나란히 걸었다.
저, 할 말이 있는데요. 오늘 룸메이트 없는데,
이 학년과 삼 학년 기숙사는 서로 완전히 반대 방향이었다. 헤어지는 갈림길 앞에서 시라부를 붙잡은 고시키가 우물거렸다.
그래서? 시라부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자고 가면 안 돼요? 내일 아침연습도 없고. 오프라 해도 정규 훈련만 없다 뿐이지 레귤러 멤버들끼리의 자율연습 일정은 그대로였다. 시라부는 차가운 태도로 팔짱을 끼고 신발코를 아스팔트 바닥에 두어 번 탁탁 굴렀다. 여차하면 정강이를 한 번 더 걷어차 주기 위해서.
내가 내 입으로 너 요새 존나 빠졌다는 소리를 한 번 더 해야 할까?
그렇지만 아까는 뭐든 들어 준다면서요. 주장이면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야, 그거는… 시라부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서브도 스파이크도 화려하게 말아 드신 주제에 어디 눈을 똑바로 뜨느냐, 고 마저 일갈하기에는 스스로 찔리는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그렇게 심한 말만 막 던져 놓고,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 알겠다고. 저번에 쓰다 남은 거 아직 있지? 고시키는 잠시 멍청히 눈만 끔벅이며 섰다가, 시라부의 말뜻을 한 박자 늦게 알아채고 확 얼굴을 붉혔다.


대체 우주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시라부는 낯선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새벽 두 시의 어둠에 싸인 책상과 벽의 흐릿한 윤곽선들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주는… 그리고 다시, 예의 낮고 속삭이는 듯한 음성. 시라부는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누웠다. 소리의 원점인 고시키는 베게를 안고 엎드려서 스마트폰으로 뭘 열심히 보고 있었다. 입술을 삐죽 물고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집중한 얼굴이었다. 시라부는 고시키의 옆얼굴을 보면서 동시에 고시키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이제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한, 덩치만 크고 어설프게 영악하다 말아 차라리 순진한 멍청이에 대해서.
뭐 보냐? 더빙판? 시라부가 묻자 그는 화면을 정지시키더니 시라부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깼어요?
누구 덕분에. 그래서 뭐 보냐고.
고시키는 재빨리 대답했고, 그의 대답을 들은 시라부는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좀 깨워서 같이 보자고 하면 덧나지.
벌써 다 봤다면서요. 예의 우주 전쟁을 다룬 프랜차이즈 시리즈는 두 사람의 견해가 잘 맞아떨어지는 몇 안 되는 주제들 중 하나였다.
그야 그렇지. 그런데 그래서 범인이 누군진 아직 모른단 말야. 그 부분만 건너뛰는 바람에.
시라부는 눈 시린 스마트폰 불빛을 피해 베개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 웅얼거렸다.


한 인간을 하나의 우주로 대하는 일에 관하여, 라면 시라부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에 비하면 배구는 차라리 간결해서 쉬웠다. 아무리 지저분하게 뜬 공이라도 스스로 입을 열어 이리 오라 저리 가라 지껄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받고, 넘기고, 쳐서 점수를 내면 그만이다. 그런 부분에서 고시키는 꽤나 성가셨다. 영리하지만 자기 주장이 강하고 고집도 만만찮았다. 세터가 논리 정연한 이유를 대며 따라오란다고 네 알겠습니다, 저를 마음대로 굴려 주세요 하며 따를 타입의 선수는 아니라는 의미다. 시라부는 코트 위에 남기 위해서 지난 겨울 내내 그와 필사적으로 합을 맞췄고 결국 살아남았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재량은 고시키 츠토무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나 애정이 아니라 공을 다룰 때와 같은 요령과 기술이면 충분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네가시마, 가 본 적 있어요? 고시키가 휴대폰을 덮어 치우다 말고 불쑥 물었다. 시라부는 고개를 저었다.
노베야마는?
동북 밖으로도 나가본 적 없어. 가족여행이라고 해 봐야 어렸을 때부터 멀면 이와테나 아오모리, 가까우면 센다이 시내 정도였고 그마저도 기숙사 딸린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요원한 일이 된 지 오래였다.
둘 다 엄청 좋은데. 나중에 같이 갈래요?
누구 돈으로? 타네가시마는 말할 것도 없고, 노베야마 천문대가 있는 나가노 현까지만 가자고 해도 학기 중에는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선배는 몸만 와요.
부잣집 아드님이라 좋겠다, 그래. 운전면허는 있고? 그러자 고시키는 뭐가 웃긴지 아예 시라부를 끌어안고 한참이나 키득거렸다.
아, 선배 왜 이렇게 귀여워요. 진짜.
뒤질래? 누가 귀엽단 거야. 시라부는 손을 내려 그의 옆구리를 콱 꼬집었다.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잠이나 자라. 내일 못 일어나면 버리고 갈 거야.


시라부는 이 마음이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안다고 믿었다. 그러나 눈 앞의 이상한 우주는 끊임없이 그를 매료시키고, 생전 안 하던 짓을 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시라부는 가끔 고시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볼 일이 있을 때면 눈부신 빛을 내며 추락하는 별, 내지는 별과 같은 무언가를 상상한다. 우주인이 되고 싶었던 시절을 오래 전에 지나온 지금의 시라부에게 우주란 한낱 관념일 뿐이었다. 평생 만날 일 없는 무언가.
그러나 당장 눈 앞에 놓인 어린 우주를 보고 있자면, 무언가를 의심 없이 믿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만 분지 일 정도는 이해해볼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묘한 기분에 곧장 잠기게 되는 것이다.
아마 너는 절대 모르겠지, 이런 마음 같은 거. 시라부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