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llucination- 환각」-1


샤움
@schaum_rjvna





카와시라, 후타시라「Hallucination- 환각」


S의 이야기-1


0.


벌써 수십 번이나 씻고 문질러보았다. 피부가 벗겨져 어느새 붉은 꽃처럼 피어난 핏방울들이 맺혀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노려보았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무의식중에 연거푸 손가락을 긁어댄다. 다시 피부가 벗겨지고 피딱지가 앉으면 또 생체기를 내었다.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드러난 속살은 보기 흉할 정도로 상해 있었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아무리 상처가 나고 다시 자신을 상처 입혀도 벗겨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二口 堅治


현실을 부정하지 말라는 듯이 네 글자는 마치 그의, 시라부 켄지로, 자신의 손가락이 원래 자기 자리인 양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지구라는 행성에 살고 있는 70억 명의 사람들, 그 수많은 생명체들이 각각마다 지닌 이름들 중에. 더럽게도 많은 글자들의 조합 중에 하필 저 네 글자. 빌어먹을 신한테 행운을 빈 적은 없어도 불행을 받을 생각은 없는데 말이야. 아연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손가락의 속살이 드러난 덕분인지 자신의 눈으로 자꾸만 파고드는 그 이름 때문인지 고통에 입술을 잘근 씹으며 그는 욕을 속으로 뇌까렸다.
가리기라도 해야지 하는 심정으로 탁자 위, 카와니시가 쓰다만 압박 붕대를 집어 들었다. 옆의 서랍장 두 번째 칸-카와니시가 필요하면 쓰라고 구급상자를 넣어놨던-서랍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가 나게 서랍이 열리고, 안을 들여다보니 연고와 함께 밴드가 들어있는 구급상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 상자를 올려놓고 잠시 망설이다 시라부는 그냥 바로 붕대를 감기로 했다. 오래간만에 해보는 테이핑, 이렇게 다시 감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흰색의 천이 손가락 위를 점점 덮었다. 자신의 기억도 함께 물어버라려 애쓴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셈을 하는 것도 포기한지 오래였다. 상처를 가리기 위해 손을 붕대로 칭칭 감을수록 과거에 그와도 얽매이는 기분에 그는 반쯤 완성된 테이핑을 던져버렸다. 뭐야 왜 또 성질부리냐. 털썩하고 침대가 내려앉았다. 카와니시가 옆에 주저앉는 소리에 언제 왔어? 시라부가 손을 뒤로 가린 채 물었다.


방금. 손은,
뭐... 가
한두 번도 아니고. 다 봤으니까 내밀어 봐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숨기던 손을 내밀자 카와니시가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작고 가녀린 그의 손을 감싸왔다.
카와니시는 언제나 그보다 컸다. 고등학교 1학년 처음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어젯밤처럼 함께 침대 위를 뒹굴면 그와 카와니시의 차이는 더 부곽되었다. 다정하지만 자신을 집어삼킬 만큼 감싸오는 손, 발, 품과 키. 항상 그가 자신보다 더 크고, 더 위에 있는 듯하여 묘한 열등감이 밀려오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어쩌면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도 카와니시가 시라부보다 거대했기 때문에 시라부는 자잘한 것들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관계의 우월성에 있어서는 시라부가 '갑'이었으며 그에 따라 쓸데없는 생각으로 자신의 지위를 스스로 낮출 필요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카와니시도 자신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것 중 일부였으니까. 그리하여, 어느 정도는 자신이 져주는 것도 예의겠지, 시라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손을 살피고 있는 카와니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카와니시는 붕대를 풀고 시라부의 상처를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전에도 조치 없이 덮었던 상처는 덧나서 짓무른 상태였다. 야, 너 이러면 더 심해져. 상처 안 없어질 수도 있어, 걱정이 어린 목소리로 연고와 소독약을 향하여 손을 가져가는 카와니시의 손목을 시라부가 잡았다.


싫어. 아무는 건 싫어.


카와니시가 탐탁지 않다는 눈빛으로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얘기야?
너도 알잖아,


시라부는 미세하게 자신의을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가는 카와니시를 무표정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물면, 다시 모든 게 반복될 것 같아서.


*


S의 이야기


1.


툭. 옆자리에서 같이 수업을 듣던 카와니시가 볼펜을 떨어뜨리는 소리에 시라부는 잠시 놓고 있었던 정신을 바로잡았다. 볼펜이 바닥에 둥글게 타원을 그리며 자신에게 다가왔다. 시선을 올려 그 근원지를 바라보니, 상체는 바로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카와니시가 보였다. 잠을 깨워줄까, 잠시 고민하다 이내 옅게 미소를 짓고는 카와니시의 허리께를 그가 떨어뜨린 볼펜으로 찔렀다. 악,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의자를 덜컹거리며 카와니시가 일어났다.
5교시 문학 시간, 선생님의 말만 울려 퍼지는 적적한 교실 내에 덜그럭 쇠가 부딫히는 소리가 나자 몇몇 학생들의 시선이 쏠렸다. 선생님은 소음에 나직히 시를 낭송하다 입을 다물고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몇몇 학생들의 조금씩 울려 퍼지던 말소리조차 잦아들자, 교실 안은 몇몇 학생의 종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밖에서 들려오는 더운 계절의 찌르르르 우는 매미 소리로 가득 찼다. 그는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숨죽여 웃으며 카와니시를 바라보았다.


카와니시 타이치, 밥도 먹고 잠도 자더니, 이제는 화장실이 가고 싶냐?


선생님의 물음에 뒤편에 앉은 몇몇 아이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에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묻혔다. 아 선생님, 왜 그러세요-. 시답잖은 학생과 선생의 대화가 조금 오고 가다 카와니시는 곧이어 자리에 앉았다. 시선을 낮추어 책에 시선을 파묻는 그를 시라부는 바라보았다. 볼때마다 느끼지만, 잘생겼네. 카와니시가 몸을 자신의 쪽으로 돌리자 시라부는 고개를 숙여 다시 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 보고 싶었지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태양의 내리쬐는 빛에 눈이 아파서, 시선을 거두었다. 아니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을 해야만 했다. 그가 눈을 돌린 이유는 것은 커튼 사이의 쨍한 햇빛도, 카와니시가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돌린 고개도 아니었다. 창밖에서 교실 안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전 애인의 모습 때문이었다.


*


그해 봄, 그러니까 한 3개월쯤 전에, 시라부는 사라졌다고만 생각했던 사람과 다시 마주치기 시작했다. 자신이 보는 것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하여 발을 내딛거나 말을 걸면 사람들은 물었다. 뭐 해 시라부? 거기 뭐 있어? 꽤 많이도 상황이 반복된 후에야 그는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이 추억과 상상속이 갇혀 만들어낸 환상뿐이라는 것을, 잊으려 해도 잊지 못하는 내면의 갈망이 만들어낸 일종의 백일몽. 그가 본다는 것은 다름 아닌 작년에 헤어진 자신의 애인, 후타쿠치 켄지였다.


시라부 켄지로는 헛것을 본다. 아니, 자신에게는 분명 실상, 거짓이 아니었지만 주변인들이 말하기에 그는 그랬다. 그저 입담으로 전해지는 헛소리가 아니라 확실한 명분을 고르자면 병원에서 내린 진단이 그것이었다. 정신분열증, 극도의 스트레스에 오랜 기간 동안 시달려 나타는 환각 증세. 종이에 적혀져 나온 몇몇의 글자. 그것이 자신을 논하고 있는 진단서였다.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더라도 장본인의 말보다는 검증이 된 상대 전문가의 말을 믿는 것은 뻔하리라. 시라부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정상인이라는 사실을 남들에게 증명하기를 포기하고 살았다.


자신을 얽매고 있는 일종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꽤나 노력도 했었다. 고작 하얀 종이에 검정 잉크를 찍어놓은 종이 한 장 덕에 한참 동안의 약물치료와 지겨운 의사와의 상담으로 시달렸고 그에 대해 불평불만 없이 따랐지만 진전은 없었다. 끝없이 반복될 것 같은 굴레 속에서 그는 이래 결론을 지었다. 애초에 자신의 애타게 갈망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자신을 묶는 것은 눈앞의 환상이 아니라 이 병원과 주변의 억압이라는 것임을 확신했다.


어쩌면 일종의 핑계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이 사랑했던 자와 만날 수 있다면. 정신 하나쯤은 무너져 내려도 좋아. 그렇기에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 자신이 보는 환각을 무시하는 법을 점차 터득했으며,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까지 이르렀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쉽게 조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하겠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악착같은 그는 상대방이 원하는 결과물을 쉬이 보여주었다. 의사들은 완치 판정을 내렸으며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에 둘러싸여 관찰당해야만 하는, 그런 시절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 곁에서 자신만의 애인을 아는 척을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